이 글은 오즈 야스지로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오즈 야스지로: 세계적인 관점들] 심포지엄에서 하스미 시게히코가 발표한 내용입니다.
오즈의 성난 여자들Ozu's Angry Women
부모-영화?
오즈 야스지로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 자리에서 저는 오즈의 영화가 유발하는 웃음이 아니라, 그의 영화에서 묘사되는 분노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오즈의 여자들은 흔히 여성스러운 미덕의 표본이라 일컬어지죠. 허나 저는 그 여자들이 보여주는 분개의 제스처를 지적함으로써 오즈의 미장센의 모던함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미조구치 겐지나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속 여자에 대해선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간 것과 달리, 오즈의 여자에 대한 논의는 드물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그 여성들의 분노에 대해선 어떠한 언급도 거의 없었다고 봐야합니다. 이러한 논쟁의 누락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오즈의 영화를 (특히나 전설적인 배우인 류 치슈가 출연하는 영화의 경우) 항상 등장하는 아버지의 이미지로 기억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형식주의자인 데이빗 보드웰 마저 그의 저서 『오즈와 영화의 시학』에서 〈늦봄〉를 논할때 '오즈는 〈외아들〉의 결말에서 보여진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여전히 고독히 희생적인 부모의 모습을 묘사할 수 있다'며 〈늦봄〉을 부모-영화로 분류했습니다. (1) 오즈의 후기 작품들은 다음과 같은 단어들로 묘사되곤 합니다; 딸을 시집보내는 홀아비의 비애. 그러나 이러한 묘사/요약에서 무의식적으로 억압된 것은 다름 아닌 시집가는 딸 본인이 당연히 느끼는 비애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분노의 몸짓
이렇게 오즈의 영화를 보는 두 관점을 언급함에 있어 한 관점의 손을 들어주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어린 딸이 아버지의 권위를 부정한다는 것 자체의 모던함을 강조하려는 것 또한 제 의도는 아닙니다. 저는 다만 (오즈의 정교한 연출 하에) 여자들이 분노를 표출하는 순간이 흔히 간과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각본 어디에도 여자들이 분노한다는 것은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 (특히나 오즈의 후기작에서) 여성이 분노의 제스처를 펼치는 장면을 여럿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언성을 높이거나 표정을 바꿔 분노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들의 몸짓으로만 감정적 변화를 보여주죠. 이러한 제스처를 위해 필요한 준비물은 평범한 옷/천 한 조각입니다. 오즈의 영화에서 어린 여성이 수건이나 스카프 따위의 소품을 내보이는 순간 저는 긴장합니다. 곧 스크린이 그녀의 분노로 진동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죠. 세 편의 영화로 예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꽁치의 맛〉, 〈고하야가와가의 가을〉, 〈동경의 황혼〉.
목에 두른 수건
〈꽁치의 맛〉에서 배우 이와시타 시마가 청홍색의 수건을 목에 두른 채 다리미질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늦은 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은 이미 어둠으로 뒤덮였죠. 집엔 그녀 외에 누구도 없지만, 열심히 일하는 그를 보는 관객은 어떠한 불균형을 느낄 것입니다. 오즈에게 수건이란 소품은 보통 남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죠. 목에 수건을 두르는 건 미혼의 여자에게 적합한 모양새가 아닙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녀가 일찍 어머니를 여읜 가족의 딸이라는 점입니다. 비록 그녀는 결혼할 수 있는 나이지만, 여전히 홀아비를 위해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와시타의 역은 하라 세츠코가 '노리코'라는 이름으로 연기해온 여성의 이미지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습니다. '노리코'에 대해선 로빈 우드가 [정의에 대한 저항: 오즈의 '노리코' 3부작]라는 저서에서 흥미롭게 연구했죠.
그러나, 하라 세츠코의 역은 (집에 홀로 있을때 조차) 한 번도 수건을 목에 두른 모습으로 등장한 적이 없으며, 〈늦봄〉의 츠카사 요코 또한 그런 바 없습니다. 이와시타와 유사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유일한 배우는 〈이른 봄〉의 아와시마 치카게입니다. 허나 비록 착장은 비슷할 지라도 이유는 다르다고 봐야죠. 이와시타와 달리 아와시마는 〈이른 봄〉에서 회사원의 피곤한 부인 역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오즈의 영화에서 미혼 여성은 흔히 그들의 새하얀 목을 조명에 드러내곤 합니다. 그러나 방금 나열한 여성들 헐렁한 옷차림으로 스크린에 등장하는 했죠. 오즈가 우연찮게 이런 실수를 범할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꽁치의 맛〉에서 이와시타 시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아버지의 둔함
류 치슈가 연기한 아버지가 귀가할 때, 그는 비틀거리며 다리미질하는 딸의 옆을 지나갑니다. 누가 봐도 평소보다 술에 취한 모습이죠. 그는 탁자에 기대며 주저앉고 딸을 엄하게 응시합니다. 영화의 앞부분을 본 사람이라면 이 어색한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실 겁니다. 아버지는 바로 전 장면에서 고등학교 은사의 안타까운 삶을 목격했습니다. 은사가 결혼시기를 놓친 딸과 함께 살며 늙었죠. 이를 본 친구가 류 치슈 또한 조심하지 않는다면 같은 처지가 될 거라 놀리고, 류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이제 그는 집안일을 하는 딸에게 화를 냅니다; '결혼 안 할 거니?' 퉁명한 얼굴로 무응답인 딸에게 짜증이 난 아버지는 결혼 이야기로 더욱 강렬하게 잔소리를 합니다. 그녀가 남자에게 눈길을 줄만한 나이고, 비록 우리는 아버지가 취기가 올라 하는 말임을 알지만 그가 '결혼'이라는 단어를 거듭해 언급해가며 딸에 대해 배려 없이 행동하는 그를 보는 관객은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좀 다르게 반응했으면 하죠. 〈늦봄〉에서의 아버지는 딸이 결혼하도록 본인이 먼저 재혼할 의향이 있다고 연기합니다. 〈꽁치의 맛〉의 아버지는 〈늦봄〉과 같은 정교한 방법을 쓰지 않을 뿐더러, 〈늦봄〉에서 딸에게 보인 (근친상간에 가까울 정도의) 애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던지는 것
딸의 쿨한 반응에 성가신 아버지는 여기 와서 앉아보라 합니다. 오즈는 이 숏을 두 가지의 거리에서 시작합니다. 처음엔 카메라가 딸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잡습니다. 다리미질을 끝내고 세탁물을 갠 뒤 일어나 아버지에게 다가오죠. 그녀가 앉으려고 하자 카메라는 가까이서 딸의 버스트 숏으로 전환합니다. 이때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무표정입니다. 두 번째 숏에서 그녀는 살짝 고개를 젖히어 목에 두른 수건을 떨굽니다.
이 짧은 몸짓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딸의 여성스러운 매력을 드러내는 동시에 아버지의 말에 저항할 것이라는 그녀의 마음을 보여주는 셈이죠. 〈꽁치의 맛〉의 비극은 아버지가 이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는 딸이 수건을 떨구는/던지는 행동이 그녀의 분노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의 둔함을 우리는 용서해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류 치슈가 연기한 아버지라 해도요. 오즈는 분명히 이 장면을 상처받은 딸의 시점에서 연출한 것입니다.
거부
만약 딸의 목에서 수건이 미끄러지는 순간이 간과된다면 이 장면의 의도/의미는 순전히 아버지의 시점에서만 읽혀질 것입니다. 그러나 수건이 떨어지는 순간의 행동의 주체는 딸이었습니다. 오즈는 그 순간을 카메라로 잡기 위해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장면을 시작한 것이죠.
〈동경의 황혼〉에서 아리마 이네코가 스카프를 풀기 위해 했던 몸짓을 보면 오즈의 의도가 확실해집니다.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의 친딸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고, 어머니를 찾아가 진실을 알고자 합니다. 어머니는 그녀와 아버지를 떠나 다른 남자와 살고 있었죠. 사실 이 작품은 전후(戰後) 오즈 영화로선 드문 설정입니다. 차가운 겨울을 배경으로 하죠. 어머니 앞에 딱딱하게 앉은 딸의 얼굴은 마치 얼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달리 어머니는 딸의 예상치 못한 방문으로 행복해보이죠.
딸은 머리를 살짝 젖혀 목을 감싼 스카프를 풉니다. 이 차가운 몸짓은 그녀가 어머니를 거부하고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때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은 〈꽁치의 맛〉에서 이와시타의 얼굴과 일치합니다. 물론 다리미하는 여자가 목에 수건을 두르거나, 추위를 타는 여성이 목에 스카프를 메는 건 흔한 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수건이나 스카프 자체가 아니라, 여자가 이러한 소품을 목에서 푸는 몸짓을 카메라가 잡았다는 점입니다. 오즈에게 이런 제스처는 딸의 분노를 나타냅니다.
무표정의 얼굴을 한 채 각자의 부모님에게 몸짓으로 불신을 표하는 두 여자와 같이 〈이른 봄〉의 아와시마 치카게는 남편을 향해 불신을 표합니다. 영화에서 그녀의 남편은 미혼의 여성과 불륜을 했습니다. 여기서도 오즈는 중요한 순간에 목에서 수건을 푸는 몸짓을 찍기 위해 수건을 목에 두르고 장면을 찍었을 것입니다.
순간의 몸짓
딸의 분노의 대상은 아버지만이 아닙니다. 분개의 몸짓은 어머니와 남편 앞에서도 등장하곤 합니다. 수건이나 스카프를 목에서 푸르는 행동은 놓칠 수 있을 정도로 빨리 지나가지만 장면에 활기를 불어넣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오즈는 표정이나 대사가 아닌, 순간적인 동작을 이용해 불신이라는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오즈의 미장센의 모던함을 봅니다.
사실 이 순간은 내러티브에 있어 의의를 지니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디테일이죠. 그러나 주제적인 관점에서 반복되는 몸짓은 무시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오즈의 영화들이 여성들의 몸짓으로 활기를 띄게 된다는 걸. 여기서 여자들은 수건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일상 소품을 던집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본 것과 정반대되는 몸짓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무언가를 줍는 것이죠.
줍는다는 것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오즈 영화에서 아내는 퇴근한 남편이 옷을 갈아입을 때 도와줍니다. 그녀가 할 일 중 하나죠. 보통 남편은 느긋하게 양복을 벗고 편안한 기모노로 옷을 갈아입습니다. 부인은 남편이 벗은 옷을 하나하나 줍죠.
남편은 셔츠나 자켓 따위를 벗을 때 아내에게 건네주지 않습니다. 다다미에 그냥 떨어뜨리죠. 아내는 허리를 굽혀가며 옷을 우아하게 줍습니다. 그중에서 단연 군계일학은 〈가을 햇살〉의 미야케 구니코입니다.
이 몸짓을 무심한 남편의 오만함으로 보거나, 인내심 있는 아내의 굴종이라 본다면 큰 오독일 것이다. 누가 봐도 오즈는 여기서 과장하고 있다. 오즈는 적합한 순간에 남편으로 하여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리도록 합니다. (의도치않게) 무언가를 떨어뜨리는 어색한 행위는 남자배우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허리를 굽혀 떨어진 손수건을 줍는 여자배우의 몸짓은 우아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부인의 몸짓은 가볍고 유연하기에 누가봐도 남편보다 우위를 점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오즈의 영화에서 여성은 줍는 데 달인입니다. 예로 〈늦봄〉에서 스기무라 하루코를 봅시다. 그녀는 아주 재밌는 몸짓을 선보입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성지의 땅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본 뒤 줍는 장면이죠. 〈동경 이야기〉의 카가와 교코와 〈가을 햇살〉의 하라 세츠코 또한 교실 바닥에서 무언가를 줍는 행위로 평이한 장면에 생기 넘치는 리듬을 불어넣습니다. 오즈는 여자배우에게 이런 제스처를 시키는 걸 매우 즐거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남자배우들에겐 이런 우아함을 허용하지 않았죠.
던져버리는 것
오즈의 몸짓에 의한 논리에 따르면 무언가를 줍는 행위의 반대되는 것은 분노를 의미합니다. 오즈의 영화에선 여자가 들고 있던 물건을 던져버리는 순간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리고 바닥에 내팽개치는 물건은 거의 항상 옷입니다.
〈피안화〉의 다나카 기누요 또한 (〈가을 햇살〉의 미야케 구니코처럼) 능숙한 몸짓으로 퇴근한 남편의 옷을 갈아입혀줍니다. 허나 이때 놀라운 순간이 등장합니다. 딸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은 남편에게 시위라도 한다는 듯, 그녀는 공들여 하나하나 주운 옷을 바닥에 던져버립니다.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에서 아라타마 미치요가 연기한 딸은 이미 기혼이나, 아버지의 이기적인 태도에 화가 나 조심스레 옷장에서 뺀 옷을 던져버립니다. 〈가을 햇살〉에서 츠카사 요코가 연기한 딸은 어머니 (하라 세츠코)의 행동을 못마땅해 합니다. 그녀는 어머니 앞에서 방금 자신이 벗은 가디건을 확 던져버리죠. 〈부초〉에서 쿄 마치코가 연기한 유랑 배우 또한 애인이 바람피운 것을 알자 손에 쥐고 있던 수건을 바닥에 던집니다.
이 작품들에서 묘사된 순간적인 분개의 몸짓은 〈가을 햇살〉에 이르러 대사와 표정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오카다 마리코가 아버지 뻘의 남자들을 상대로 마치 최종 변론을 펼치는 검사처럼 말하는 장면이 그러하죠. 그녀의 연설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는 오즈의 다른 영화에서 순간적으로 묘사된 여성들의 분노적 제스처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앉으라 권유한 의자에 앉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기분 나쁜 행동을 무분별하게 비판하며 오카다는 결국 성공합니다. 그들로부터 사과를 받아내고야 말죠 (물론 그녀가 진지해 보일수록 더욱 웃겨지지 만요). 이 장면은 오즈에게 여성의 분노만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인상을 남깁니다.
오즈의 '느림'
조나단 로젠봄의 통찰력 있는 글 '오즈는 느린가?'의 제목에서 볼 수 있다시피 (3), 오즈의 작품들은 흔히 시간의 경과를 느긋한 흐름으로 따라간다 여겨지곤 합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더욱 생각하게 하거나,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법한 디테일은 제거함으로써 이를 이뤄내죠. 〈바람 속의 암탉〉에서 전역한 남편이 아내를 계단으로 밀어버린 장면, 그리고 〈부초〉의 빗속 남자와 여자의 욕설이 오가는 장면에서 볼 수 있다시피 오즈의 영화는 개개인 간의 갈등이 묘사되긴 하나, 흔히 질서가 복원되며 끝나는 것이 특징으로 일컬어집니다.
물론 어느정도 맞는 말입니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은 사건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일을 벌이지 않습니다. 허나 그렇다면 여성들이 수건 따위를 목에서 잡아당기고 갑작스레 옷 따위를 바닥에 던지는 장면들은 이야기의 중심에서 벗어난 에피소드라 봐야할까요? 이러한 제스처는 강조된 분노의 묘사라기보다, 내러티브에 어떠한 변화도 만들지 못하는 순간적 시각 이미지라고 보여집니다.
작별의 의식
그러나, 〈동경의 황혼〉에서 아리마 이네코가 (어머니 앞에서) 목에 두른 스카프를 잡아당긴 그 날, 그녀는 자살 사고에 의해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부모님께 (몰래) 낙태를 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말이죠. 이것은 그녀의 제스처가 피할 수 없는 내러티브적 변화를 예견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꽁치의 맛〉의 이와시타는 어땠을까요?
여기서도 우린 중대한 사건을 지나쳐선 안 됩니다. 그녀가 아버지와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 채, 결혼할 것이라 체념한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은 매우 유사한 〈늦봄〉의 마지막 장면과 비교할 때 더욱 뚜렷해집니다. 요시다 기주가 자신의 저서 〈오즈의 안티-시네마〉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두 작품은 일종의 반복이지만, 둘의 차이가 매우 두드러진다는 것이죠. 둘의 차이점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대목은 다음 두 대목입니다; 1) 〈꽁치의 맛〉에서 결혼식 날 아침에 차려 입은 딸과 아버지의 이별 장면이 매우 건조하게 찍혔다는 점, 그리고 2) 그날 저녁 홀로 남은 아버지를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 그러합니다. 요시다에 의하면 이것은 '아주 따분하고 비예술적이며 단조로운 이미지’입니다.
〈꽁치의 맛〉을 찍을 시점에 오즈는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홀아비가 딸을 시집보내며 느끼는 비애의 이야기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으며, 픽션에서조차 되풀이될 수 없다는 것을. 이와시타 시마가 아버지 앞에서 수건을 잡아당길 때 어쩌면 오즈 야스지로는 그녀의 제스처 안에서 자기 자신의 작별인사를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꽁치의 맛〉은 오즈 야스지로의 유작입니다
1) 데이빗 보드웰, 오즈와 영화의 시학 (p.308)
2) 로빈 우드, 성 정치학과 내러티브 영화: 할리우드와 그 너머 (p. 94 –138)
3) 조너던 로젠봄, 에센셜 시네마 (p. 146-151)
언급된 영화들
- 늦봄 晩春
- 외아들 一人息子
- 꽁치의 맛 秋刀魚の味
- 고하야가와가의 가을 小早川家の秋
- 동경의 황혼 東京暮色
- 이른 봄 早春
- 가을 햇살 秋日和
- 동경 이야기 東京物語
- 피안화 彼岸花
- 바람 속의 암탉 風の中の牝鶏
- 부초 浮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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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 미키오는 일본 영화에서 오즈 다음으로 와야 할 이름이다. 올해 초 진행된 그의 회고전을 다니며 그의 영화를 볼때마다, 그에 대한 세계의 뒤늦은 발견을 대신해 사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름들과 같이, 그는 무성영화로 영화 만들기를 시작한 사람이다. 유성영화에 이르자 그는 대사를 없애고 그 자리에 본인만의 제스처와 시선을 넣는다. 침묵이 흐르는 자리에 대사를 대신하는 눈빛과 손짓이 일상적 공간과 만나 (혹은 그 공간을 의도적으로 피함으로서) 하나의 '영화적 사건'이 된다. 이런 영화적 사건은 나루세의 현대적 가치관과 맞물려 그 힘을 발휘한다. 나루세는 그 누구보다도 개인으로서의 자립을 지지한 사람이 아닐까 하기 때문이다. 오늘 소개할 〈흐트러진 구름〉의 유미코가 계속 되풀이 하는 대사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돈을 더 이상 받고 싶지 않아',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등). 또한 이 영화에서 남편의 가족이 주인공을 밀어낸 것은 어떻게 보면 그녀로 하여금 억지로 맺어진 혈연 관계를 벗어나 개인으로서 서게 하는 역할이라 볼 수 있다. 이의 연장선에서, 결국 이어지지 못한 사랑은 절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어긋난 시선의 순간은 가슴 아픈 순간이지만, 서로에게 행복을 비는 아름다운 순간이기도 하다.
나루세의 영화에서 개인으로서 자립한다는 것은 영화에서 개인의 단위로 사유하는 것과 연결된다. 다시 말해 이어질 수 없는 혹은 이어지지 말아야 할 파토스의 선이 서로 만나려 할 때, 그 둘은 어긋나야 하며 인물들과 관객들은 어긋난 선 사이 균열을 응시해야 한다. 그 응시를 통해서, 서로의 간극을 인정할때 비로소 자립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사유는 단순한 멜로드라마의 형태로 나타난다. 나루세의 영화는 결국 멜로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단순한 문장이 나루세의 위대함의 반증이다. 영화는 거의 정의가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매체기에, 자신만의 정의를 찾은 감독은 위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 단순히 성립하는 영화는 위대하다. 나루세의 영화는 결국 '남자과 여자'로만 성립되기 때문에 위대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루세의 영화에는 항상 '남자와 여자'로 치환되는 순간이 등장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지위와 사회적 관계 등의 기호가 지워짐으로서 불가능한 남녀의 사랑을 가능케 보이도록 하는 순간이 생기는 셈이다. 〈흐트러진 구름〉에서 그 순간은 유미코가 미시마를 간호해주는 장면이다.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아픈 남자와 그의 손을 꼭 잡는 여자의 '정'이 폭풍과 번개가 반짝이고 울리는 바깥의 '동'과 대비되며 만들어내는 나루세적 스펙터클에서 그의 정수를 맛보았다. 사실 이 장면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전개를 지적하는 이도 있지만, 어쩌면 무모할 정도로 '남과 여'를 끌어와 자신의 영화로 만든 이 결정은 나루세가 자신으로부터 달아나는 삶을 붙잡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작품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결국 이 작품의 그의 유작으로 남게 되었다).
〈흐트러진 구름〉은 다른 나루세의 영화가 그렇듯이 가늠하기 힘든 깊이를 지닌 우물과 같다.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의 차이에서 비롯된 이 우물은 표면과 내면의 긴밀한 숨박꼭질로 번지게 된다 (이 숨박꼭질은 쇼트와 시퀀스 단위에 멈추지 않는다. 〈흐트러진 구름〉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시간과 순간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음을 떠올리면 된다). 여기서 나루세가 보여주는 얌전해보이는 표면 속엔 아련함, 죄의식, 섹슈얼리티가 끓고 있다. 생활 공간 속에서 남녀가 앉고 일어나는 것, 앞뒤를 오가며 앞을 바라보고 뒤돌아 보는 것 모두 단순히 그 행위를 넘어 함의를 띄고 있다. 이렇게 시각적 함의로 주어지는 영화적 감흥이야 말로 나루세의 영화가 지니는 가장 큰 힘 중 하나다. 이런 감흥이 등장하는 대표적 장면은 미시마가 집에서 여자친구와 만나는 장면이다. 여기서 두 남녀는 일반 가옥에 있지만, 마치 무대에 오른 사람들처럼 지속된 동선의 변화로 앞과 뒤, 좌우가 바뀐다. 그러던 와중 여자가 함께 아오모리에 가지 못한다고 하니 카메라는 창 밖으로 나가며 둘을 창틀로 갈라놓는다. 이별을 선언한 여자는 갑자기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는데 이때 둘의 눈이 맞는다. 둘의 시선을 담은 미디엄 쇼트가 연이어 등장하고 카메라가 다시 창 밖으로 나가 우리에겐 닫힌 커튼 밖에 보이지 않는다. 단 한 번의 노출도 없이 이렇게 애절하고 야릇한 분위기를 단숨에 만들어내는게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가 가지는 힘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둘의 관계로 이어지지 않는다. 남자가 커튼을 제끼고 창문을 연다. 이때 말은 한번도 오가지 않는다. 그의 뜻을 아는 여자는 말없이 핸드백을 집고 나간다. 이때 그녀는 열쇠를 놓고 간다. 일시적 이별이 영원한 결별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다시 보니 이별을 이렇게 잡는 감독은 몇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루세에겐 무성영화로 시작한 감독만이 지닌 감각이 있다. 그건 달리 말하자면, '말'과 '소리'의 차이를 아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흐트러진 구름〉이다. 무엇이 구름을 흐트러지게 했을까? 바로 '소리'이다. '말' 없는 인물들은 침묵을 유지하는데, 외부의 소리가 구름을 흩어지게 하는 것이다. 영화를 지배하는 사건이지만 이미지로 보이지 않는 '남편의 교통사고'를 보자. 정작 그 사건의 이미지 자체는 생략되었지만 그의 여진이 진동하는 이 영화의 방식은 관계나 노출의 순간이 없이 두 남녀 간 에로스를 다루는 나루세의 영화 그 자체와도 같다. 시끄럽게 점멸등 소리가 울리고 유미코는 버스에 탄다. 바로 다음 쇼트에서 그녀의 형부는 유미코의 남편이 사고를 당했다는 전화를 받는다. 생략된 사건, 혹은 생략된 이 이미지는 작품에서 두 번 재현된다. 첫번째 재현은 유미코가 낙태 수술을 위해 마취할 때인데, 여기서 화면은 페이드 아웃하고, 그녀의 이름을 외치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즉, 그녀의 상상이다). 두번째 재현에선 불길의 전조 같이 다시 한번 울리는 점멸등의 소리가 남녀의 침묵을 파고든다. 이로부터 대사가 없다시피한 시퀀스가 진행된다. 영화의 초반부에서도 보여지듯이 자동차로 이동하는 순간들은 모두 과거를 소환하는 성격을 지니는데, 이 시퀀스는 자동차의 움직임으로 과거를 소환하는 동시에 현재의 고뇌를 끄집어내고 불가능한 사랑의 미래까지 예견케 한다. 남편의 교통사고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목격하는 남녀는 말없이 어긋난 시선으로 침묵을 유지할 뿐이다. 유성영화가 발명한 것은 결국 '침묵'이다.[1] 나루세는 누구보다도 침묵의 순간들이 얼마나 애절하고 가슴아픈지 아는 사람이며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그것의 가장 아름다운 예일 것이다.
이때 떠오르는 영화는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이다. 나루세와 로셀리니는 다른 단위와 방식의 사유를 통해 같은 이미지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먼저 두 영화는 여자의 과거 여행으로 이뤄져 있다. 한 영화에선 나폴리의 유적, 유산을 찾아가는 여자가 등장하고, 한 영화에선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과거로 시간 여행을 경험하는 여자가 등장한다. 타지의 과거와 자신의 과거, 이 두 여행에서도 명백한 것은 문명의 근심을 진 사유를 하는 로셀리니와 달리 나루세는 지극히 개인의 관점에서 사유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로셀리니가 나루세보다 위대하다는 주장의 근거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영화는 연달아 목격하는 죽음의 이미지에 다른 반응을 보인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손을 잡은 두 남녀가 죽음의 순간에 보존된 모습을 봤을때, 문명의 짐을 지닌 두 남녀는 세상과 화해해야만 했고, 재결합 해야'만' 했다. 반면, 〈흐트러진 구름〉에서 여자가 여관 앞에서 자살한 남녀를 보는 순간 영화는 남자와 여자 사이 희미한 선을 그린다. 그러나 둘이 함께 죽음의 이미지를 맞이한 순간, 그 희미한 선은 끊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살기 위해 이어지지 말아야 할 선은 끊어져야 한다.
그러면 이제 끊어진 선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공간을 말할 차례다. 나루세의 영화에서 생활하는 공간, 일본적인 공간은 오즈와 다르며,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항상 앉아 정면가슴 아래 높이를 비추는 카메라의 방향으로 말을 건네는 오즈의 인물들과 달리, 나루세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앉았다 일어나를 반복하며 그 자체로 영화적 제스처를 형성한다. 이런 제스처의 베경이 되는 곳은 일본식 공간이자, 생활공간으로서 문으로 연결된 두 방, 다다미방으로 대표된다. 이때 주목할 만한 것이, 이 영화에서 단 한번도 유미코의 집 안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가 자신의 집 속 다다미방에 앉아있는 모습을 우린 단 한번도 보지 못한다 (심지어 그녀가 혼자 집 안에 있는 모습을 보여준 후, 집에서 나오는 쇼트를 의도적으로 보여줌으로서 그녀가 온전히 있던 공간은 원래 살던 가정의 집이 아니라고 못박아둔다). 영화의 이런 결정은 어쩌면 그녀도 제목처럼 항상 떠다닐 구름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고 되묻게 만든다. 이런 질문도 잠시, 영화의 인물들은 이 초반부를 제외하고 거의 항상 여관에서 지낸다. 이때, 이 여관또한 두 방이 연결된 생활 공간으로서 공간 내의 연속성이 보장되어있다. 이런 공간은 나루세의 영화에서 '남과 여'의 애정을 서로 확인하기에 걸맞은 공간이 되기 어렵다.[2] 허나, 영화에서 둘의 파토스가 모아진 공간도 다른 지역의 것이긴 했지만, 여관이었고 마지막 서로의 간극을 인지한 공간도 여관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의문을 가질 만하다. 이때 나루세는 주의깊게 보라고 말한다. 전자의 공간은 여관이지만 의도적으로 외부의 풍경과 대비시켜 고립된 공간임을 명시할 뿐만 아니라, 방 안에서의 연속성이 제시되지 않는다. 반면, 후자의 공간의 마지막 쇼트, 즉 남자가 여자에게 행복을 빌며 노래를 부르는 쇼트에서 우린 방 안의 공간을 연결하는 문 틀 사이로 두 남녀를 본다. 연속된 공간임을 긍정하는 동시, '남과 여'로 치환됨을 부정하는 순간인 것이다.
나루세의 영화는 결국 '시선의 영화'이기도 하다. 시선이 만들어내는 드라마, 이는 시선으로 인해 감정이 촉발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촉발된 이후에는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킨 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3] 서로를 바라봐서는 안되는 인물들이 그 불가능함을 인정하게 되는 마지막 순간은, 앞서 말한 공간의 드라마라는 측면 뿐만 아니라, 이런 시선의 드라마에 있어서 지극히 나루세적인 순간이다. 그래서 온전한 사랑은 지나온 과거에만 머물어 있는 셈이다 (계속해 남편을 추억하는 유미코의 플래시백, 미시마의 전 여인이 남긴 열쇠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이런 과거를 제시하는 순간들이다). 먼저 시선의 어긋남은 제스처의 연장선에서 볼 때, 좌식 생활에서 앉고 서는 제스처의 어긋남과 연결된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남자가 노래를 부르는 마지막 장면 바로 전에 등장하는 장면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재확인한 여자는 주저앉고, 남자는 선 채로 뒷걸음친다. 또한 시선의 교환은 (혹은 그 교환의 불가능함은) 더 큰 의미에서 (일본) 사회와 그 안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피로감에서 유발되는 것이며 인물들은 이를 계속해 되뇌인다 (둘 만이 남아 비를 피할 때, '왜 우릴 쳐다보는거야? 범죄자도 아닌데'라 말하는 미시마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이렇게 잔인한 고통에 대해 유운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란 시선들로 짜인 감옥이며 (나루세적) 연인들은 연인이 되기 위해 오직 그들만이 시선을 교환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어디론가 간다'.[4]
자신을 바라봐 주길 원하는 남자의 노래, 허나 차마 바라볼 수 없는 여자의 모습, 이 가슴아픈 선율과 이미지가 함께 등장하는 순간 관객은 고개를 떨군 여자를 주목하게 된다. 시선의 교환이라는 가능성은 나루세 특유의 서스펜스를 상기시킨다. 과연 둘은 마지막으로 서로를 마주볼까? 그러는 순간, 마치 초반부에서 닫힌 커튼이 열리던 순간처럼, 쇼트가 문틀에 걸친 것으로 바뀌며 그들이 있던 여관이 연속된 공간, 필연적으로 '남과 여'가 거부되는 그 나루세적 공간이었음이 드러난다. 시선의 드라마가 공간의 드라마와 만나는 이 순간, 나루세는 마지막으로 둘이 서로를 응시함은 없을 것이라 보여주는 셈이다.
결국 남자는 전차를 타고 떠나며, 라호르로 갈 것이다. 그를 떠나보낸 여자는 홀로 강을 바라보며 서 있는다. 나루세라는 위대한 시네아스트가 남긴 마지막 이미지, 하나가 될 수 없었던 남녀가 각자의 길을 가는 것, 남자를 떠나 보낸 여자가 '떠다니는 구름'이 아님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1] 로베르 브레송,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
[2] 하스미 시게히코 · 야마네 사다오, 『나루세 미키오』
[3],[4] 유운성, 〈하나의 시선을 위한 퍼포먼스: 나루세 미키오에 대한 노트〉
언급한 영화들:
- 흐트러진 구름 (乱れ雲, 1967)
- 이탈리아 여행 (Viaggio in Italia,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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