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스미 시게히코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스필버그는 여전히 너무 알려졌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다. 상당수의 해외 비평가들은 스필버그를 작가로서 바라보지 않는 경향이 있고, 정작 그보다 못한 여러 감독에겐 온갖 신경을 써가며 비평적 할애를 다투곤 한다. 물론 이를 감안한다고 해도 이번 작품에 대한 무관심은 너무 심하다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린치의 영화에서 왜 여자가 항상 우는지 궁금해하고, 이스트우드의 남자가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를 궁금해 하지만, 스필버그의 남자가 항상 집에 돌아오는 것은 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까. 이 비평가들은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가 디지털 시네마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 '영화적 사건'이라 생각하지만 존 포드가 〈젊은 날의 링컨〉과 〈역마차〉를 한 해에 만든 것이 말이 안되는 것처럼 스필버그가 〈틴틴〉과 〈군마〉를 같은 해에 만들었다는 사실이 '영화적 사건'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BFG〉를 둘러싼 오해를 보며 트뤼포가 히치콕에 대해 미국에서 얘기한 일화가 떠올랐다. 히치콕의 〈이창〉에 대해 미국 기자가 트뤼포에게 말하길, '당신은 왜 히치콕과 이 영화를 높이 평가합니까? 혹시 당신이 뉴욕을 몰라서 그런 것 아닐런지요'. 그러자 트뤼포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이것은 영화에 대한 영화입니다. 난 뉴욕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영화에 대해선 알 만큼 압니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BFG〉가 '영화에 대한 영화'임을 쉽게 알아차리고 공감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스필버그는 어느때보다 영화와 영화를 이루는 새로운 물성을 힘차게 긍정한다.
〈BFG〉는 꿈을 잡고 만들며 나눠주는 거인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거인'이라는 단어를 제외하면 '영화 감독'의 정의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소피가 거인의 '꿈 나눠주기'에 처음으로 동행하는 장면에서 우린 이 영화가 영화에 대한 우화임을 처음 깨닫게 된다. 신비로운 안개가 아이와 어른 사이 방을 가르고 일종의 스크린이 되어 '꿈(영화)'을 영사하고, 이때 창문으로 이를 바라보는 거인과 소피의 얼굴은 관객의 자리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꿈을 제조하는 장면은 이에 더한다. 소피의 도움으로 거인이 꿈의 요소들을 동그란 기계에 넣은 후, 이를 다른 휠로 돌리니 천장에 안개가 생기고 꿈이 보이는 모습은 영사기에 필름 릴을 돌려 스크린에 상영하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노골적으로 영화에 대한 우화임을 선언하는 데서 스필버그의 전략이 끝난다면 참으로 빈곤한 것일 테다 (그렇기 때문에 〈BFG〉를 논하며 영화에 대한 영화로서의 메타성만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는 이런 선언 속 '좋은' 꿈의 역할에 대한 긍정을 제스처의 수사로 선보인다. 그 수사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 먼저 '긍정'이라는 표현과 함께 〈BFG〉를 논할 때 많이 쓰이는 '순수'라는 수식어를 언급하고 싶다. 〈BFG〉를 단순한 '순수' 환영의 우화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건 스필버그가 수많은 소설 중 로알드 달의 이야기를 가져왔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예견된 바다. 〈BFG〉는 되려 내재한 불투명함을 투명하게 만드는 영화로, 순수하지 못한 꿈의 세상에서 순수한 꿈만을 보이고픈 몸짓의 영화다. 해피엔딩의 동화같아 보이는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정작 영화 속엔 어린 아이들의 납치와 식인거인이 등장한다. 이렇게 불투명한 배경 속 빛을 밝혀주는 것은 다름 아닌 꼬마 거인의 몸짓이다.
꼬마 거인이 소피의 안경을 챙기는 행위는 〈BFG〉를 관통하는 제스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피는 눈이 그닥 좋지 않아 안경을 자주 쓰는게 정상인 아이인데,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안경을 자주 쓰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소피가 안경을 착용한 다음 순간들은 눈여겨 봐야한다.
1) 새벽에 몰래 책을 읽고 꼬마 거인을 발견해 납치당하는 장면
2) 꿈나라(Dream Country)에서 꿈의 소리를 들으려 할 때
3) 꼬마 거인과 함께 아이에게 꿈을 불어넣어줄 때
4) 꼬마 거인이 자신을 잡아줄 거라 믿으며 떨어질 때
이 장면을 제외한 수많은 상황에서 소피는 안경을 쓰지 않는다. 특히나 식인 거인들이 등장하는 악몽과도 같은 장면에 그녀는 항상 안경을 착용하지 않고 있으며, 거인들이 예상치 못한 순간 씬에 입장할 때 자신의 안경을 떨어뜨리거나 놓친다. 결국 좋은 꿈과 연관되는 장면엔 항상 안경을 쓰고, 그렇지 않은 장면에선 안경을 벗고 있는 셈이다. 이때 나쁜 꿈과 같은 씬에서 놓치고 떨어뜨린 안경을 조심스레 챙겨주고, 2번과 같이 좋은 꿈에 해당하는 경우에 안경을 건네주는 사려깊은 꼬마 거인의 제스처야 말로 먹구름을 걷혀주는 몸짓으로, 〈BFG〉의 가장 아름다운 요소다.
스필버그에게 영화는 항상 집으로 귀환하는 사람의 것으로 거울에 의해 보여졌다. 이는 그의 최근 영화들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군마〉는 떠나고 돌아오는 말의 운동 자체가 영화의 원동력이 되는 거울의 영화고, 〈링컨〉은 존 포드의 〈젊은 날의 링컨〉이 다룬 시기와 안에서 벌어지는 숏들을 보이지 않는 거울에서 바라본 영화였으며, 〈첩자들의 다리〉는 집으로 귀환하는 스파이와 변호사가 거울을 봄으로서 귀환을 예감하고, 거울이 비춰짐으로서 집에 도착함을 실감하게 만든 영화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BFG〉를 보면 저절로 의문이 드는 대목이 생긴다. 거울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소피가 처음으로 궁전에 도착한 장면이라는 점. 영화의 마지막에 소피가 앞서 잃어버린 담요를 쓴 채로 궁전에서 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모습이 나오게 되고 우린 묻게 된다. 소피의 집은 어디인가? 고아원에서 시작한 영화는 모두 꿈이었는가?
그 질문에 〈BFG〉의 아름다움이 숨겨져있다. 〈BFG〉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물성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어디가 꿈이고 어디가 현실인지 육안으로 구분하기 힘든 인공적인 물성이 영화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 유일한 차이를 느끼게 만드는 것은 소피라는 아날로그 육체와 거인이라는 디지털 육체다. 그리고 이 둘을 함께 담은 주된 풍경인 거인나라(Giant Country)의 물성은 신비로운 것으로 남는다. 마치 포드의 영화에서 귀환하기 위해 거치는, 영화 자체가 사로잡힌 풍경인 모뉴먼트 밸리처럼 자이언트 컨트리의 거대한 바위와 푸른 풍경은 여기서도 귀환을 위해 꼭 거쳐야하는 풍경으로 서부극의 중심에 자리잡은 그 지평선의 '형상'과 같은 역할을 하고, 스필버그는 (말하자면 이미지 그 자체보다 이미지의 개념으로서) 이 '형상'을 디지털에 새겨 얻어냈다.
집과 귀환의 질문은 이뿐만 아니라 창 안으로 꿈을 들여다보는 행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BFG〉에서 여러번에 걸쳐 나오는 이 행위는 마치 '영화 보기'와도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에 놓인, 눈 앞의 같은 이미지를 거울처럼 대칭적으로 마주보게 된 〈첩자들의 다리〉의 도노번을 저절로 떠올리게 만든다. 근작에 가까워질수록 스필버그는 관객과 스크린의 필연적 간극이 불러일으키는 질문을 잊지 않는다. 항상 긍정된 스필버그적 인물의 귀환은 언젠가부터 아이러니의 향기를 듬뿍 풍기고, 관객의 자리를 되묻게한다. 헌데, 〈첩자들의 다리〉는 모든 갈등이 끝난 것으로만 보이는 마지막에 같은 숏을 반복함으로서 우리에게 결국 거리에 대한 영화였음을 다시 인지시킨다. 그렇다면 〈BFG〉는 어떠한가? 꿈과 같은 거인나라와 반대인 현실의 경계엔 항상 창문이 있었다. 창문 밖에서 창문 안으로 꿈을 넣고, 창문 밖에서 안의 꿈을 보곤 했다. 이런 경계의 유희가 중첩되는 순간에(소피가 여왕에게 꼬마 거인을 소개하는 순간) 소피가 창문 틀에 서 있음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BFG〉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피는 침대에서 일어 안경을 쓰지 않은 채 창문 밖을 쳐다본다. 안경을 착용하지 않은 채 창문 밖을 보고 BFG를 부르는 그녀의 외침이 직접적으로 그녀의 말을 듣는 꼬마 거인의 숏과 연결될 때, 우린 비로소 '본다'는 행위가 전이되어 현실로 옮겨질 수 있다는 스필버그의 믿음을 엿보게 된다. 밤 런던의 아날로그적 배경으로 시작해 빛나는 아침의 디지털 얼굴로 끝나는 이 영화에서 스필버그는 디지털이야말로 관객이 얽매였던 자리에서 해방될 수 있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언급한 영화들:
- 내 친구 꼬마 거인 (The BFG, 2016)
- 아바타 (Avatar, 2009)
- 젊은 날의 링컨 (Young Mr. Lincoln, 1939)
- 역마차 (Stagecoach, 1939)
- 틴틴의 모험 (The Adventures of Tintin, 2011)
- 군마 (War Horse, 2011)
- 이창 (Rear Window, 1954)
- 링컨 (Lincoln, 2012)
- 첩자들의 다리 (Bridge of Spie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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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엔틴 타란티노는 자신이 사랑한 영화, 배우와 장르를 재조립해 영화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시네아스트 중 한 명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전히 사람들의 입엔 타란티노의 작품이 지닌 재미와 감정적 카타르시스에 대한 논의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 글에선 타란티노의 가장 훌륭한 영화 중 한 편인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을 통해 그가 영화다움을 추구하는 동시에 영화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내포한 작품을 만드는지 말해보려 한다.
〈바스터즈〉에서 타란티노는 시작부터 끝까지 수많은 영화로부터 마음껏 차용하며, 감탄을 부르는 대사들로 긴장을 유지시켜 언제나 그렇듯이 관객에게 영화적 경험을 제시한다. 여기에 멈추지 않는고 더 멀리 나간다는 것이 이 작품의 중요한 지점이자, 그의 영화 중 어떤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바스터즈〉는 영화에 대한 사랑과 근심이 동시에 드러나는 작품으로, '영화 자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표면적 믿음 속 그 선언의 불가능성을 인지하는 영화다. 여기엔 아름답고 화려한 영화의 역사 뿐만 아니라, 그의 악용 사례 또한 넘친다.
1장: 옛날 옛적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에서
오프닝 타이틀의 음악은 〈알라모〉의 주제곡으로, 멕시코 영토였던 텍사스의 독립선언을 잠재우기 위해 파견된 토벌군을 상대로 알라모에서 맞서다 죽은 이들의 이야기다. 시작의 음악부터 타란티노는 우리에게 이 영화가 존 웨인이라는 배우로 대표되는 서부극과 역사와 영화 속 역사의 괴리에 대한 것이라고 귀띔해주고 있는 셈이다. 'Once Upon A Time'이라는 눈에 익은 오프닝 타이틀과 서부극을 보는 듯한 마을의 풍경이 등장하며 노골적인 귀띔은 계속된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한스 란다와 피에르의 대화 장면은 환한 밖과 달리 로우키 조명으로 촬영하여 입장할 때부터 불길한 느낌이 저절로 유발한다.
이 장면에서 타란티노는 외화면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한스 란다의 위압감을 제시한다. 두 남자가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기 전, 한스 란다에게 피에르의 딸이 우유를 따라주는 순간 밖에서 젖소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대목의 그 시작이며, 이어지는 대화의 숏을 처리하는 규칙에서도 드러나는 바다. 대화의 초반엔 오버 더 숄더 숏의 숏-리버스 숏으로 대응되어 보이는 두 남자의 모습은, 피에르가 '유대인 사냥꾼' 한스 란다의 명성을 인정하자 변하게 된다. 이부터 란다가 말하는 숏은 같은 오버 더 숄더 숏의 방식을 유지해 피에르의 뒷모습을 보여주지만, 피에르가 대사를 읊자 란다를 외화면으로 처리해버린다. 반복해 튕기는 숏에서 땀으로 가득찬 피에르의 뒷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드는데 충분하다.
드넓은 풍경에서 폐쇄된 집 안으로 이동하는 공간의 압박, 대사로 좁혀가는 한스 란다의 어휘력과 긴장 순간에 피에르의 얼굴을 클로즈업을 해 다가가 카메라 속에 갇힌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카메라의 압박, 그리고 언어의 압박 (한스 란다는 피에르의 집에 들어가자 마자 딸들의 외모를 칭찬하고 우유를 요구했다. 피에르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언급하며 무의식적으로 그를 압박한 셈이다) 3중주의 요소가 차츰 차츰 쌓이며 사람을 몰아가고 조인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서스펜스를 선사한다.
이런 서스펜스가 가장 고조되는 순간은 매우 중요하다. 한스 란다가 피에르에게 유태인들이 어디있는지 캐낸 후, 프랑스어로 말하며 몰살을 준비하는 숏에서 타란티노는 나치군의 발만 찍는다. 바닥 밑에 숨어있는 유태인들의 시점으로 보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유태인들은 제대로 보이지 못하는 존재들에 의해 몰살을 당한다. 3년 후, 쇼산나가 한스 란다를 다시 만나게 되어 몰살의 날을 회상할 때 흐르는 음악은 〈심령의 공포〉의 노래다. 타란티노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강간당하는 이야기(〈심령의 공포〉)와 보이지 않는 나치군에게 죽임을 당한 유태인들의 이야기(〈바스터즈〉)를 연결하고 있다.
2장: Inglourious Basterds & 3장: 파리에서의 독일 저녁
바스터즈가 등장하는 2장의 제목은 영화 자체의 제목으로, 의미심장한 부대의 등장을 예고한다. 타란티노는 영화의 1부에서 오프닝-음악과 제목으로 서부극을 불러내었는데, 쇼산나가 도망치는 장면에서 본인의 선언을 가장 뚜렷히 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예전부터 타란티노는 공개적으로 존 포드-존 웨인이 대표하는 서부극에 대한 분노와 경멸을 언급해왔다 (여기서 다루진 않겠지만,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이 이런 감정은 존 포드의 영화에 대한 오해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쇼산나가 도망치는 장면은 엄연히 〈수색자〉의 두 숏을 불러내는 것이다. 〈수색자〉의 클라이맥스 즈음에 나탈리 우드가 존 웨인으로부터 도망치며 동굴에 다가가는 숏과 존 웨인이 집 문을 나서며 그리우는 그림자가 아른한 마지막 숏. 타란티노는 두 숏과 반전된 도식의 숏을 가져와 도망치는 인디언-백인 여자의 자리에 유대인 쇼산나를 놓고 존 웨인의 자리에 악명 높은 나치를 위치시킨다.
이어서 도망친 쇼산나가 다시 등장하고, 나치군 프레더릭 졸러가 작업을 걸 듯이 말을 거는 장면은 〈바스터즈〉가 영화 내내 영화임을 인지시키고, 인물들이 일종의 역할을 연기하는 듯한 톤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여기서 나치군인 졸러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쇼산나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기 때문에 계속 말을 걸지만 그녀에게 그는 나치군일 뿐이다. 타란티노는 오프닝에서 외화면을 활용한 것처럼 둘의 대화 장면을 비슷한 방식으로 찍어 각자의 입장을 쉽게 제시한다. 졸러가 말을 할때 쇼산나는 프레임 밖에 있지만, 쇼산나에 관심있고 귀 기울이는 졸러는 그녀가 말하는 쇼트에서 프레임 안에 있다. 둘의 대화가 끝나고 떠나가는 졸러의 모습은 마치 무대에서 퇴장하는 연기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 장면에서 보이듯이 〈바스터즈〉가 하나의 연극같이 느껴지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바스터즈〉는 〈수색자〉를 향한 단순한 오마주보다, 미국-프랑스의 두 배우의 이름을 빌려 2차 대전을 새로운 배경 삼아 은밀하게 재연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바스터즈의 대장 알도 레인(Aldo Raine)은 명백히 배우 알도 레이(Aldo Ray)의 이름을 따온 것이며, 쇼산나의 가명(Emmanuelle Mimieux)은 영화에서 감탄사처럼 속삭여지는 다니엘 다류(Danielle Darrieux)의 변주다. 존 웨인과 함께 문에 위치한 란다와 달리, 알도 레인은 직접적으로 존 웨인의 역할을 맡은 캐릭터로, 인디언 피가 섞인 사람이며 숨어있다 공격하는 방식 또한 서부극에서 아파치의 그것과 동일하고, 〈수색자〉에서 세뇌당한 나탈리 우드와 달리 쇼산나는 본인의 복수를 위해 가명을 쓰고 '연기'를 한다. 〈수색자〉의 클라이맥스와 달리 〈바스터즈〉에서 이 둘은 만나지 못한다.
4장: 키노 작전
타란티노와 직접 대화한 적이 없으니 알 수 없지만, 나는 분명히 마지막 두 챕터 때문에 타란티노가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믿는다. 앞의 두 서사가 교차하게 되는 그 지점, 바로 시네마 작전이다. 작전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영화평론가다. 그는 바스터즈의 일원들과 프랑스의 지하 술집에 잡입하여 모두와 같이 (영화 내내 그랬던 것처럼) '연기'를 한다. 캐릭터들은 다른 국적의 인물을 연기하고, 다른 언어를 구사하며, 다른 복장을 입는다.
이러한 연기를 가장한 놀이인 카드 게임은 길게 유지되는 술집 장면에서 꾸준히 극 앞에 놓인다. 이것은 여러 의미에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인물들이 얼굴에 붙여있는 무언가를 맞추려한다는 것이 놀이의 주 목적, 다시 말해 인물들이 일종의 가면을 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가면의 추리의 대상이 무엇인가 하면 극의 배경의 영화 산업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바스터즈〉는 꾸준히 소환/불러내는 서부극 영화들과 달리 '미국'이라는 정체성은 기피한다. 유태인과 나치라는 구도는 명백하지만, 프랑스, 영국, 미국 등 국적을 앞세우지 않고 있다. 그 이유를 이 놀이로 타란티노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타란티노는 냉소를 띈 미소를 지으며 역사를 (나쁜 의미로) 바꾼 영화사의 범인은 독일 뿐만 아니라 미국 또한 해당한다.
마치 윙크하듯이 적힌 부분이 두 번째 카드 게임이다. 킹콩'이라는 답을 맞추기 위해 독일 장교는 근원, 행적 등에 대한 질문을 한다. 그가 답에 가까워짐에 따라 은연 중에 답이 둘 중 하나로 좁히게 된다. 흑인과 킹콩. 정글에서 사슬에 묶인 채 미국에 온 존재라는 힌트에 야수 '킹콩'과 사람인 '흑인'이 같은 취급을 받아온 이른 역사에 대한 타란티노의 비판이라 볼 수 있다.
5장: 거대한 얼굴의 역습
드디어 도달한 클라이맥스의 장소는 바로 극장이다. 주요 나치 인사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고 서로의 존재를 모른채 두 작전이 진행되어 만나는 공간이다. 이 장면에서 우린 타란티노가 성숙해지고 진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데쓰 프루프〉까지만 해도 그는 도덕, 윤리를 신경쓰지 않고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데 온 힘을 써왔다. 그렇기에 그의 전작들은 딱히 윤리를 논할 위치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바스터즈〉는 윤리적인 영화다. 그는 영화가 비윤리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인지시켜 영화가 현실로 전이되는 현상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탑에서 적군을 쏴 죽이는 졸러의 모습을 보고 기쁨과 감동에 찬 나치의 모습은 미국 유태인 두 명의 총에 쏘여 죽어가는 나치의 모습을 보고 통쾌해하는 우리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특히나 이때 영화 속 영화의 졸러가 탑에서 총을 쏜 것처럼 〈바스터즈〉의 유대인 두 명은 2층의 오페라석에서 아래로 총을 쏘고 있다). 이미 죽을 운명임을 알고 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는 더 심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이 사태 바로 전엔 쇼산나가 졸러와 함께 죽는다. 이것 또한 그와 말한 바가 아니므로 알 수 없지만, 타란티노가 영화 각본을 처음 집필할 때부터 쇼산나는 죽을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의 이유가 떠오르는데, 다음 장면에서 자신이 만든 영화로 스크린에 등장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유령 같다는 점과 이 영화에서 타란티노가 영화사 속 '영화'를 훼손한 인물들을 모두 죽였다는 점이다. 평소에 타란티노는 영화 자체와 그것의 가장 숭고한 형태인 필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믿음을 각종 인터뷰로 고백해왔다. 쇼산나는 수백개의 필름을 불로 태울 계획을 세웠고, 그 댓가를 치룬 셈이다.
쇼산나의 커다란 얼굴이 등장함과 함께 불에 붙은 필름은 결국 영화 스크린의 이미지가 곧 현실이 되는, 너무나도 순수한 영화적인 환영이다. 영화 속 현실이 영화의 영화로 (쇼산나의 죽음 이후 등장한 그녀의 스크린 위 형상) 번지고 영화의 영화가 영화 속 현실로 (프레더릭 졸러의 활약에 이어 나오는 바스터즈의 총질), 궁극적으로 영화 속 현실이 영화 밖 현실로 (〈국가의 자랑〉을 보고 웃던 나치의 모습이 나치를 죽이는 바스터즈의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우리의 모습으로) 감염되는 스크린의 '순수한' 환영에 대해 타란티노는 근심한 표정을 내비치고 있다. 영화 속 영화에서 스크린이 불태워 없어짐으로서 영화 속 관객은 현실에 놓이게 되고, 이는 결국 영화관 안에 있는 자가 모두 살아남지 못한 것과 연결된다. 결국 영화의 총소리에 집중하느라 영화관 밖 총소리를 듣지 못한 관객은 총에 죽는다 (타란티노는 이 효과를 위해 여러 장면에서 상영관 밖 총소리가 난후 인물이 초조하게 상영관 속을 들여다 보는 장면을 넣는다).
그러나 이 영화가 단순히 영화에 대한 의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영화의 4장엔 한스 란다가 발견한 한 짝의 구두를 여자 배우에게 맞춰보려하는 장면이 나온다. 5장에서 그가 미국과 협상하는 장면을 보며 그 구두가 떠올랐다. 이것은 한스 란다의 '신데렐라'인가? 어쩌면 맞을 수도 있다. 여기서 타란티노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가 아는 역사만이 진실인가? 영화가 진실일 수도 있다고 그는 믿는다. 결국 우리가 본 이야기에서 역사에 남는 것은 한스 란다일 것이고, 어디에도 쇼산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연기' 때문에 위기에 놓이고 죽음을 마주친 여러 명의 '배우'들과 달리, 언어의 능구렁이인 한스 란다는 마치 이 모든 이야기를 집필한 감독과도 같다.
〈바스터즈〉는 영화에 대한 사랑만을 고백하고 통쾌함을 선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다. 되려 전혀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삼은 〈수색자〉의 시대착오적 재연으로, 영화사와 영화 자체에 대한 믿음과 불신의 씨름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언급한 영화들
-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Inglourious Basterds, 2009)
- 알라모 (The Alamo, 1960)
- 심령의 공포 (The Entity, 1982)
- 수색자 (The Searchers, 1956)
- 데쓰 프루프 (Death Proof,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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