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세 미키오는 일본 영화에서 오즈 다음으로 와야 할 이름이다. 올해 초 진행된 그의 회고전을 다니며 그의 영화를 볼때마다, 그에 대한 세계의 뒤늦은 발견을 대신해 사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름들과 같이, 그는 무성영화로 영화 만들기를 시작한 사람이다. 유성영화에 이르자 그는 대사를 없애고 그 자리에 본인만의 제스처와 시선을 넣는다. 침묵이 흐르는 자리에 대사를 대신하는 눈빛과 손짓이 일상적 공간과 만나 (혹은 그 공간을 의도적으로 피함으로서) 하나의 '영화적 사건'이 된다. 이런 영화적 사건은 나루세의 현대적 가치관과 맞물려 그 힘을 발휘한다. 나루세는 그 누구보다도 개인으로서의 자립을 지지한 사람이 아닐까 하기 때문이다. 오늘 소개할 〈흐트러진 구름〉의 유미코가 계속 되풀이 하는 대사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돈을 더 이상 받고 싶지 않아',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등). 또한 이 영화에서 남편의 가족이 주인공을 밀어낸 것은 어떻게 보면 그녀로 하여금 억지로 맺어진 혈연 관계를 벗어나 개인으로서 서게 하는 역할이라 볼 수 있다. 이의 연장선에서, 결국 이어지지 못한 사랑은 절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어긋난 시선의 순간은 가슴 아픈 순간이지만, 서로에게 행복을 비는 아름다운 순간이기도 하다.
나루세의 영화에서 개인으로서 자립한다는 것은 영화에서 개인의 단위로 사유하는 것과 연결된다. 다시 말해 이어질 수 없는 혹은 이어지지 말아야 할 파토스의 선이 서로 만나려 할 때, 그 둘은 어긋나야 하며 인물들과 관객들은 어긋난 선 사이 균열을 응시해야 한다. 그 응시를 통해서, 서로의 간극을 인정할때 비로소 자립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사유는 단순한 멜로드라마의 형태로 나타난다. 나루세의 영화는 결국 멜로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단순한 문장이 나루세의 위대함의 반증이다. 영화는 거의 정의가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매체기에, 자신만의 정의를 찾은 감독은 위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 단순히 성립하는 영화는 위대하다. 나루세의 영화는 결국 '남자과 여자'로만 성립되기 때문에 위대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루세의 영화에는 항상 '남자와 여자'로 치환되는 순간이 등장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지위와 사회적 관계 등의 기호가 지워짐으로서 불가능한 남녀의 사랑을 가능케 보이도록 하는 순간이 생기는 셈이다. 〈흐트러진 구름〉에서 그 순간은 유미코가 미시마를 간호해주는 장면이다.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아픈 남자와 그의 손을 꼭 잡는 여자의 '정'이 폭풍과 번개가 반짝이고 울리는 바깥의 '동'과 대비되며 만들어내는 나루세적 스펙터클에서 그의 정수를 맛보았다. 사실 이 장면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전개를 지적하는 이도 있지만, 어쩌면 무모할 정도로 '남과 여'를 끌어와 자신의 영화로 만든 이 결정은 나루세가 자신으로부터 달아나는 삶을 붙잡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작품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결국 이 작품의 그의 유작으로 남게 되었다).
〈흐트러진 구름〉은 다른 나루세의 영화가 그렇듯이 가늠하기 힘든 깊이를 지닌 우물과 같다.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의 차이에서 비롯된 이 우물은 표면과 내면의 긴밀한 숨박꼭질로 번지게 된다 (이 숨박꼭질은 쇼트와 시퀀스 단위에 멈추지 않는다. 〈흐트러진 구름〉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시간과 순간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음을 떠올리면 된다). 여기서 나루세가 보여주는 얌전해보이는 표면 속엔 아련함, 죄의식, 섹슈얼리티가 끓고 있다. 생활 공간 속에서 남녀가 앉고 일어나는 것, 앞뒤를 오가며 앞을 바라보고 뒤돌아 보는 것 모두 단순히 그 행위를 넘어 함의를 띄고 있다. 이렇게 시각적 함의로 주어지는 영화적 감흥이야 말로 나루세의 영화가 지니는 가장 큰 힘 중 하나다. 이런 감흥이 등장하는 대표적 장면은 미시마가 집에서 여자친구와 만나는 장면이다. 여기서 두 남녀는 일반 가옥에 있지만, 마치 무대에 오른 사람들처럼 지속된 동선의 변화로 앞과 뒤, 좌우가 바뀐다. 그러던 와중 여자가 함께 아오모리에 가지 못한다고 하니 카메라는 창 밖으로 나가며 둘을 창틀로 갈라놓는다. 이별을 선언한 여자는 갑자기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는데 이때 둘의 눈이 맞는다. 둘의 시선을 담은 미디엄 쇼트가 연이어 등장하고 카메라가 다시 창 밖으로 나가 우리에겐 닫힌 커튼 밖에 보이지 않는다. 단 한 번의 노출도 없이 이렇게 애절하고 야릇한 분위기를 단숨에 만들어내는게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가 가지는 힘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둘의 관계로 이어지지 않는다. 남자가 커튼을 제끼고 창문을 연다. 이때 말은 한번도 오가지 않는다. 그의 뜻을 아는 여자는 말없이 핸드백을 집고 나간다. 이때 그녀는 열쇠를 놓고 간다. 일시적 이별이 영원한 결별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다시 보니 이별을 이렇게 잡는 감독은 몇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루세에겐 무성영화로 시작한 감독만이 지닌 감각이 있다. 그건 달리 말하자면, '말'과 '소리'의 차이를 아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흐트러진 구름〉이다. 무엇이 구름을 흐트러지게 했을까? 바로 '소리'이다. '말' 없는 인물들은 침묵을 유지하는데, 외부의 소리가 구름을 흩어지게 하는 것이다. 영화를 지배하는 사건이지만 이미지로 보이지 않는 '남편의 교통사고'를 보자. 정작 그 사건의 이미지 자체는 생략되었지만 그의 여진이 진동하는 이 영화의 방식은 관계나 노출의 순간이 없이 두 남녀 간 에로스를 다루는 나루세의 영화 그 자체와도 같다. 시끄럽게 점멸등 소리가 울리고 유미코는 버스에 탄다. 바로 다음 쇼트에서 그녀의 형부는 유미코의 남편이 사고를 당했다는 전화를 받는다. 생략된 사건, 혹은 생략된 이 이미지는 작품에서 두 번 재현된다. 첫번째 재현은 유미코가 낙태 수술을 위해 마취할 때인데, 여기서 화면은 페이드 아웃하고, 그녀의 이름을 외치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즉, 그녀의 상상이다). 두번째 재현에선 불길의 전조 같이 다시 한번 울리는 점멸등의 소리가 남녀의 침묵을 파고든다. 이로부터 대사가 없다시피한 시퀀스가 진행된다. 영화의 초반부에서도 보여지듯이 자동차로 이동하는 순간들은 모두 과거를 소환하는 성격을 지니는데, 이 시퀀스는 자동차의 움직임으로 과거를 소환하는 동시에 현재의 고뇌를 끄집어내고 불가능한 사랑의 미래까지 예견케 한다. 남편의 교통사고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목격하는 남녀는 말없이 어긋난 시선으로 침묵을 유지할 뿐이다. 유성영화가 발명한 것은 결국 '침묵'이다.[1] 나루세는 누구보다도 침묵의 순간들이 얼마나 애절하고 가슴아픈지 아는 사람이며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그것의 가장 아름다운 예일 것이다.
이때 떠오르는 영화는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이다. 나루세와 로셀리니는 다른 단위와 방식의 사유를 통해 같은 이미지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먼저 두 영화는 여자의 과거 여행으로 이뤄져 있다. 한 영화에선 나폴리의 유적, 유산을 찾아가는 여자가 등장하고, 한 영화에선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과거로 시간 여행을 경험하는 여자가 등장한다. 타지의 과거와 자신의 과거, 이 두 여행에서도 명백한 것은 문명의 근심을 진 사유를 하는 로셀리니와 달리 나루세는 지극히 개인의 관점에서 사유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로셀리니가 나루세보다 위대하다는 주장의 근거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영화는 연달아 목격하는 죽음의 이미지에 다른 반응을 보인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손을 잡은 두 남녀가 죽음의 순간에 보존된 모습을 봤을때, 문명의 짐을 지닌 두 남녀는 세상과 화해해야만 했고, 재결합 해야'만' 했다. 반면, 〈흐트러진 구름〉에서 여자가 여관 앞에서 자살한 남녀를 보는 순간 영화는 남자와 여자 사이 희미한 선을 그린다. 그러나 둘이 함께 죽음의 이미지를 맞이한 순간, 그 희미한 선은 끊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살기 위해 이어지지 말아야 할 선은 끊어져야 한다.
그러면 이제 끊어진 선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공간을 말할 차례다. 나루세의 영화에서 생활하는 공간, 일본적인 공간은 오즈와 다르며,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항상 앉아 정면가슴 아래 높이를 비추는 카메라의 방향으로 말을 건네는 오즈의 인물들과 달리, 나루세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앉았다 일어나를 반복하며 그 자체로 영화적 제스처를 형성한다. 이런 제스처의 베경이 되는 곳은 일본식 공간이자, 생활공간으로서 문으로 연결된 두 방, 다다미방으로 대표된다. 이때 주목할 만한 것이, 이 영화에서 단 한번도 유미코의 집 안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가 자신의 집 속 다다미방에 앉아있는 모습을 우린 단 한번도 보지 못한다 (심지어 그녀가 혼자 집 안에 있는 모습을 보여준 후, 집에서 나오는 쇼트를 의도적으로 보여줌으로서 그녀가 온전히 있던 공간은 원래 살던 가정의 집이 아니라고 못박아둔다). 영화의 이런 결정은 어쩌면 그녀도 제목처럼 항상 떠다닐 구름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고 되묻게 만든다. 이런 질문도 잠시, 영화의 인물들은 이 초반부를 제외하고 거의 항상 여관에서 지낸다. 이때, 이 여관또한 두 방이 연결된 생활 공간으로서 공간 내의 연속성이 보장되어있다. 이런 공간은 나루세의 영화에서 '남과 여'의 애정을 서로 확인하기에 걸맞은 공간이 되기 어렵다.[2] 허나, 영화에서 둘의 파토스가 모아진 공간도 다른 지역의 것이긴 했지만, 여관이었고 마지막 서로의 간극을 인지한 공간도 여관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의문을 가질 만하다. 이때 나루세는 주의깊게 보라고 말한다. 전자의 공간은 여관이지만 의도적으로 외부의 풍경과 대비시켜 고립된 공간임을 명시할 뿐만 아니라, 방 안에서의 연속성이 제시되지 않는다. 반면, 후자의 공간의 마지막 쇼트, 즉 남자가 여자에게 행복을 빌며 노래를 부르는 쇼트에서 우린 방 안의 공간을 연결하는 문 틀 사이로 두 남녀를 본다. 연속된 공간임을 긍정하는 동시, '남과 여'로 치환됨을 부정하는 순간인 것이다.
나루세의 영화는 결국 '시선의 영화'이기도 하다. 시선이 만들어내는 드라마, 이는 시선으로 인해 감정이 촉발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촉발된 이후에는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킨 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3] 서로를 바라봐서는 안되는 인물들이 그 불가능함을 인정하게 되는 마지막 순간은, 앞서 말한 공간의 드라마라는 측면 뿐만 아니라, 이런 시선의 드라마에 있어서 지극히 나루세적인 순간이다. 그래서 온전한 사랑은 지나온 과거에만 머물어 있는 셈이다 (계속해 남편을 추억하는 유미코의 플래시백, 미시마의 전 여인이 남긴 열쇠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이런 과거를 제시하는 순간들이다). 먼저 시선의 어긋남은 제스처의 연장선에서 볼 때, 좌식 생활에서 앉고 서는 제스처의 어긋남과 연결된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남자가 노래를 부르는 마지막 장면 바로 전에 등장하는 장면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재확인한 여자는 주저앉고, 남자는 선 채로 뒷걸음친다. 또한 시선의 교환은 (혹은 그 교환의 불가능함은) 더 큰 의미에서 (일본) 사회와 그 안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피로감에서 유발되는 것이며 인물들은 이를 계속해 되뇌인다 (둘 만이 남아 비를 피할 때, '왜 우릴 쳐다보는거야? 범죄자도 아닌데'라 말하는 미시마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이렇게 잔인한 고통에 대해 유운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란 시선들로 짜인 감옥이며 (나루세적) 연인들은 연인이 되기 위해 오직 그들만이 시선을 교환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어디론가 간다'.[4]
자신을 바라봐 주길 원하는 남자의 노래, 허나 차마 바라볼 수 없는 여자의 모습, 이 가슴아픈 선율과 이미지가 함께 등장하는 순간 관객은 고개를 떨군 여자를 주목하게 된다. 시선의 교환이라는 가능성은 나루세 특유의 서스펜스를 상기시킨다. 과연 둘은 마지막으로 서로를 마주볼까? 그러는 순간, 마치 초반부에서 닫힌 커튼이 열리던 순간처럼, 쇼트가 문틀에 걸친 것으로 바뀌며 그들이 있던 여관이 연속된 공간, 필연적으로 '남과 여'가 거부되는 그 나루세적 공간이었음이 드러난다. 시선의 드라마가 공간의 드라마와 만나는 이 순간, 나루세는 마지막으로 둘이 서로를 응시함은 없을 것이라 보여주는 셈이다.
결국 남자는 전차를 타고 떠나며, 라호르로 갈 것이다. 그를 떠나보낸 여자는 홀로 강을 바라보며 서 있는다. 나루세라는 위대한 시네아스트가 남긴 마지막 이미지, 하나가 될 수 없었던 남녀가 각자의 길을 가는 것, 남자를 떠나 보낸 여자가 '떠다니는 구름'이 아님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1] 로베르 브레송,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
[2] 하스미 시게히코 · 야마네 사다오, 『나루세 미키오』
[3],[4] 유운성, 〈하나의 시선을 위한 퍼포먼스: 나루세 미키오에 대한 노트〉
언급한 영화들:
- 흐트러진 구름 (乱れ雲, 1967)
- 이탈리아 여행 (Viaggio in Italia,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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