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의 성난 여자들
이 글은 오즈 야스지로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오즈 야스지로: 세계적인 관점들] 심포지엄에서 하스미 시게히코가 발표한 내용입니다.
오즈의 성난 여자들Ozu's Angry Women
부모-영화?
오즈 야스지로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 자리에서 저는 오즈의 영화가 유발하는 웃음이 아니라, 그의 영화에서 묘사되는 분노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오즈의 여자들은 흔히 여성스러운 미덕의 표본이라 일컬어지죠. 허나 저는 그 여자들이 보여주는 분개의 제스처를 지적함으로써 오즈의 미장센의 모던함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미조구치 겐지나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속 여자에 대해선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간 것과 달리, 오즈의 여자에 대한 논의는 드물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그 여성들의 분노에 대해선 어떠한 언급도 거의 없었다고 봐야합니다. 이러한 논쟁의 누락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오즈의 영화를 (특히나 전설적인 배우인 류 치슈가 출연하는 영화의 경우) 항상 등장하는 아버지의 이미지로 기억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형식주의자인 데이빗 보드웰 마저 그의 저서 『오즈와 영화의 시학』에서 〈늦봄〉를 논할때 '오즈는 〈외아들〉의 결말에서 보여진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여전히 고독히 희생적인 부모의 모습을 묘사할 수 있다'며 〈늦봄〉을 부모-영화로 분류했습니다. (1) 오즈의 후기 작품들은 다음과 같은 단어들로 묘사되곤 합니다; 딸을 시집보내는 홀아비의 비애. 그러나 이러한 묘사/요약에서 무의식적으로 억압된 것은 다름 아닌 시집가는 딸 본인이 당연히 느끼는 비애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분노의 몸짓
이렇게 오즈의 영화를 보는 두 관점을 언급함에 있어 한 관점의 손을 들어주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어린 딸이 아버지의 권위를 부정한다는 것 자체의 모던함을 강조하려는 것 또한 제 의도는 아닙니다. 저는 다만 (오즈의 정교한 연출 하에) 여자들이 분노를 표출하는 순간이 흔히 간과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각본 어디에도 여자들이 분노한다는 것은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 (특히나 오즈의 후기작에서) 여성이 분노의 제스처를 펼치는 장면을 여럿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언성을 높이거나 표정을 바꿔 분노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들의 몸짓으로만 감정적 변화를 보여주죠. 이러한 제스처를 위해 필요한 준비물은 평범한 옷/천 한 조각입니다. 오즈의 영화에서 어린 여성이 수건이나 스카프 따위의 소품을 내보이는 순간 저는 긴장합니다. 곧 스크린이 그녀의 분노로 진동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죠. 세 편의 영화로 예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꽁치의 맛〉, 〈고하야가와가의 가을〉, 〈동경의 황혼〉.
목에 두른 수건
〈꽁치의 맛〉에서 배우 이와시타 시마가 청홍색의 수건을 목에 두른 채 다리미질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늦은 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은 이미 어둠으로 뒤덮였죠. 집엔 그녀 외에 누구도 없지만, 열심히 일하는 그를 보는 관객은 어떠한 불균형을 느낄 것입니다. 오즈에게 수건이란 소품은 보통 남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죠. 목에 수건을 두르는 건 미혼의 여자에게 적합한 모양새가 아닙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녀가 일찍 어머니를 여읜 가족의 딸이라는 점입니다. 비록 그녀는 결혼할 수 있는 나이지만, 여전히 홀아비를 위해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와시타의 역은 하라 세츠코가 '노리코'라는 이름으로 연기해온 여성의 이미지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습니다. '노리코'에 대해선 로빈 우드가 [정의에 대한 저항: 오즈의 '노리코' 3부작]라는 저서에서 흥미롭게 연구했죠.
그러나, 하라 세츠코의 역은 (집에 홀로 있을때 조차) 한 번도 수건을 목에 두른 모습으로 등장한 적이 없으며, 〈늦봄〉의 츠카사 요코 또한 그런 바 없습니다. 이와시타와 유사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유일한 배우는 〈이른 봄〉의 아와시마 치카게입니다. 허나 비록 착장은 비슷할 지라도 이유는 다르다고 봐야죠. 이와시타와 달리 아와시마는 〈이른 봄〉에서 회사원의 피곤한 부인 역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오즈의 영화에서 미혼 여성은 흔히 그들의 새하얀 목을 조명에 드러내곤 합니다. 그러나 방금 나열한 여성들 헐렁한 옷차림으로 스크린에 등장하는 했죠. 오즈가 우연찮게 이런 실수를 범할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꽁치의 맛〉에서 이와시타 시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아버지의 둔함
류 치슈가 연기한 아버지가 귀가할 때, 그는 비틀거리며 다리미질하는 딸의 옆을 지나갑니다. 누가 봐도 평소보다 술에 취한 모습이죠. 그는 탁자에 기대며 주저앉고 딸을 엄하게 응시합니다. 영화의 앞부분을 본 사람이라면 이 어색한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실 겁니다. 아버지는 바로 전 장면에서 고등학교 은사의 안타까운 삶을 목격했습니다. 은사가 결혼시기를 놓친 딸과 함께 살며 늙었죠. 이를 본 친구가 류 치슈 또한 조심하지 않는다면 같은 처지가 될 거라 놀리고, 류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이제 그는 집안일을 하는 딸에게 화를 냅니다; '결혼 안 할 거니?' 퉁명한 얼굴로 무응답인 딸에게 짜증이 난 아버지는 결혼 이야기로 더욱 강렬하게 잔소리를 합니다. 그녀가 남자에게 눈길을 줄만한 나이고, 비록 우리는 아버지가 취기가 올라 하는 말임을 알지만 그가 '결혼'이라는 단어를 거듭해 언급해가며 딸에 대해 배려 없이 행동하는 그를 보는 관객은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좀 다르게 반응했으면 하죠. 〈늦봄〉에서의 아버지는 딸이 결혼하도록 본인이 먼저 재혼할 의향이 있다고 연기합니다. 〈꽁치의 맛〉의 아버지는 〈늦봄〉과 같은 정교한 방법을 쓰지 않을 뿐더러, 〈늦봄〉에서 딸에게 보인 (근친상간에 가까울 정도의) 애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던지는 것
딸의 쿨한 반응에 성가신 아버지는 여기 와서 앉아보라 합니다. 오즈는 이 숏을 두 가지의 거리에서 시작합니다. 처음엔 카메라가 딸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잡습니다. 다리미질을 끝내고 세탁물을 갠 뒤 일어나 아버지에게 다가오죠. 그녀가 앉으려고 하자 카메라는 가까이서 딸의 버스트 숏으로 전환합니다. 이때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무표정입니다. 두 번째 숏에서 그녀는 살짝 고개를 젖히어 목에 두른 수건을 떨굽니다.
이 짧은 몸짓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딸의 여성스러운 매력을 드러내는 동시에 아버지의 말에 저항할 것이라는 그녀의 마음을 보여주는 셈이죠. 〈꽁치의 맛〉의 비극은 아버지가 이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는 딸이 수건을 떨구는/던지는 행동이 그녀의 분노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의 둔함을 우리는 용서해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류 치슈가 연기한 아버지라 해도요. 오즈는 분명히 이 장면을 상처받은 딸의 시점에서 연출한 것입니다.
거부
만약 딸의 목에서 수건이 미끄러지는 순간이 간과된다면 이 장면의 의도/의미는 순전히 아버지의 시점에서만 읽혀질 것입니다. 그러나 수건이 떨어지는 순간의 행동의 주체는 딸이었습니다. 오즈는 그 순간을 카메라로 잡기 위해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장면을 시작한 것이죠.
〈동경의 황혼〉에서 아리마 이네코가 스카프를 풀기 위해 했던 몸짓을 보면 오즈의 의도가 확실해집니다.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의 친딸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고, 어머니를 찾아가 진실을 알고자 합니다. 어머니는 그녀와 아버지를 떠나 다른 남자와 살고 있었죠. 사실 이 작품은 전후(戰後) 오즈 영화로선 드문 설정입니다. 차가운 겨울을 배경으로 하죠. 어머니 앞에 딱딱하게 앉은 딸의 얼굴은 마치 얼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달리 어머니는 딸의 예상치 못한 방문으로 행복해보이죠.
딸은 머리를 살짝 젖혀 목을 감싼 스카프를 풉니다. 이 차가운 몸짓은 그녀가 어머니를 거부하고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때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은 〈꽁치의 맛〉에서 이와시타의 얼굴과 일치합니다. 물론 다리미하는 여자가 목에 수건을 두르거나, 추위를 타는 여성이 목에 스카프를 메는 건 흔한 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수건이나 스카프 자체가 아니라, 여자가 이러한 소품을 목에서 푸는 몸짓을 카메라가 잡았다는 점입니다. 오즈에게 이런 제스처는 딸의 분노를 나타냅니다.
무표정의 얼굴을 한 채 각자의 부모님에게 몸짓으로 불신을 표하는 두 여자와 같이 〈이른 봄〉의 아와시마 치카게는 남편을 향해 불신을 표합니다. 영화에서 그녀의 남편은 미혼의 여성과 불륜을 했습니다. 여기서도 오즈는 중요한 순간에 목에서 수건을 푸는 몸짓을 찍기 위해 수건을 목에 두르고 장면을 찍었을 것입니다.
순간의 몸짓
딸의 분노의 대상은 아버지만이 아닙니다. 분개의 몸짓은 어머니와 남편 앞에서도 등장하곤 합니다. 수건이나 스카프를 목에서 푸르는 행동은 놓칠 수 있을 정도로 빨리 지나가지만 장면에 활기를 불어넣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오즈는 표정이나 대사가 아닌, 순간적인 동작을 이용해 불신이라는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오즈의 미장센의 모던함을 봅니다.
사실 이 순간은 내러티브에 있어 의의를 지니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디테일이죠. 그러나 주제적인 관점에서 반복되는 몸짓은 무시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오즈의 영화들이 여성들의 몸짓으로 활기를 띄게 된다는 걸. 여기서 여자들은 수건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일상 소품을 던집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본 것과 정반대되는 몸짓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무언가를 줍는 것이죠.
줍는다는 것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오즈 영화에서 아내는 퇴근한 남편이 옷을 갈아입을 때 도와줍니다. 그녀가 할 일 중 하나죠. 보통 남편은 느긋하게 양복을 벗고 편안한 기모노로 옷을 갈아입습니다. 부인은 남편이 벗은 옷을 하나하나 줍죠.
남편은 셔츠나 자켓 따위를 벗을 때 아내에게 건네주지 않습니다. 다다미에 그냥 떨어뜨리죠. 아내는 허리를 굽혀가며 옷을 우아하게 줍습니다. 그중에서 단연 군계일학은 〈가을 햇살〉의 미야케 구니코입니다.
이 몸짓을 무심한 남편의 오만함으로 보거나, 인내심 있는 아내의 굴종이라 본다면 큰 오독일 것이다. 누가 봐도 오즈는 여기서 과장하고 있다. 오즈는 적합한 순간에 남편으로 하여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리도록 합니다. (의도치않게) 무언가를 떨어뜨리는 어색한 행위는 남자배우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허리를 굽혀 떨어진 손수건을 줍는 여자배우의 몸짓은 우아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부인의 몸짓은 가볍고 유연하기에 누가봐도 남편보다 우위를 점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오즈의 영화에서 여성은 줍는 데 달인입니다. 예로 〈늦봄〉에서 스기무라 하루코를 봅시다. 그녀는 아주 재밌는 몸짓을 선보입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성지의 땅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본 뒤 줍는 장면이죠. 〈동경 이야기〉의 카가와 교코와 〈가을 햇살〉의 하라 세츠코 또한 교실 바닥에서 무언가를 줍는 행위로 평이한 장면에 생기 넘치는 리듬을 불어넣습니다. 오즈는 여자배우에게 이런 제스처를 시키는 걸 매우 즐거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남자배우들에겐 이런 우아함을 허용하지 않았죠.
던져버리는 것
오즈의 몸짓에 의한 논리에 따르면 무언가를 줍는 행위의 반대되는 것은 분노를 의미합니다. 오즈의 영화에선 여자가 들고 있던 물건을 던져버리는 순간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리고 바닥에 내팽개치는 물건은 거의 항상 옷입니다.
〈피안화〉의 다나카 기누요 또한 (〈가을 햇살〉의 미야케 구니코처럼) 능숙한 몸짓으로 퇴근한 남편의 옷을 갈아입혀줍니다. 허나 이때 놀라운 순간이 등장합니다. 딸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은 남편에게 시위라도 한다는 듯, 그녀는 공들여 하나하나 주운 옷을 바닥에 던져버립니다.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에서 아라타마 미치요가 연기한 딸은 이미 기혼이나, 아버지의 이기적인 태도에 화가 나 조심스레 옷장에서 뺀 옷을 던져버립니다. 〈가을 햇살〉에서 츠카사 요코가 연기한 딸은 어머니 (하라 세츠코)의 행동을 못마땅해 합니다. 그녀는 어머니 앞에서 방금 자신이 벗은 가디건을 확 던져버리죠. 〈부초〉에서 쿄 마치코가 연기한 유랑 배우 또한 애인이 바람피운 것을 알자 손에 쥐고 있던 수건을 바닥에 던집니다.
이 작품들에서 묘사된 순간적인 분개의 몸짓은 〈가을 햇살〉에 이르러 대사와 표정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오카다 마리코가 아버지 뻘의 남자들을 상대로 마치 최종 변론을 펼치는 검사처럼 말하는 장면이 그러하죠. 그녀의 연설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는 오즈의 다른 영화에서 순간적으로 묘사된 여성들의 분노적 제스처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앉으라 권유한 의자에 앉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기분 나쁜 행동을 무분별하게 비판하며 오카다는 결국 성공합니다. 그들로부터 사과를 받아내고야 말죠 (물론 그녀가 진지해 보일수록 더욱 웃겨지지 만요). 이 장면은 오즈에게 여성의 분노만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인상을 남깁니다.
오즈의 '느림'
조나단 로젠봄의 통찰력 있는 글 '오즈는 느린가?'의 제목에서 볼 수 있다시피 (3), 오즈의 작품들은 흔히 시간의 경과를 느긋한 흐름으로 따라간다 여겨지곤 합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더욱 생각하게 하거나,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법한 디테일은 제거함으로써 이를 이뤄내죠. 〈바람 속의 암탉〉에서 전역한 남편이 아내를 계단으로 밀어버린 장면, 그리고 〈부초〉의 빗속 남자와 여자의 욕설이 오가는 장면에서 볼 수 있다시피 오즈의 영화는 개개인 간의 갈등이 묘사되긴 하나, 흔히 질서가 복원되며 끝나는 것이 특징으로 일컬어집니다.
물론 어느정도 맞는 말입니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은 사건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일을 벌이지 않습니다. 허나 그렇다면 여성들이 수건 따위를 목에서 잡아당기고 갑작스레 옷 따위를 바닥에 던지는 장면들은 이야기의 중심에서 벗어난 에피소드라 봐야할까요? 이러한 제스처는 강조된 분노의 묘사라기보다, 내러티브에 어떠한 변화도 만들지 못하는 순간적 시각 이미지라고 보여집니다.
작별의 의식
그러나, 〈동경의 황혼〉에서 아리마 이네코가 (어머니 앞에서) 목에 두른 스카프를 잡아당긴 그 날, 그녀는 자살 사고에 의해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부모님께 (몰래) 낙태를 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말이죠. 이것은 그녀의 제스처가 피할 수 없는 내러티브적 변화를 예견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꽁치의 맛〉의 이와시타는 어땠을까요?
여기서도 우린 중대한 사건을 지나쳐선 안 됩니다. 그녀가 아버지와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 채, 결혼할 것이라 체념한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은 매우 유사한 〈늦봄〉의 마지막 장면과 비교할 때 더욱 뚜렷해집니다. 요시다 기주가 자신의 저서 〈오즈의 안티-시네마〉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두 작품은 일종의 반복이지만, 둘의 차이가 매우 두드러진다는 것이죠. 둘의 차이점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대목은 다음 두 대목입니다; 1) 〈꽁치의 맛〉에서 결혼식 날 아침에 차려 입은 딸과 아버지의 이별 장면이 매우 건조하게 찍혔다는 점, 그리고 2) 그날 저녁 홀로 남은 아버지를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 그러합니다. 요시다에 의하면 이것은 '아주 따분하고 비예술적이며 단조로운 이미지’입니다.
〈꽁치의 맛〉을 찍을 시점에 오즈는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홀아비가 딸을 시집보내며 느끼는 비애의 이야기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으며, 픽션에서조차 되풀이될 수 없다는 것을. 이와시타 시마가 아버지 앞에서 수건을 잡아당길 때 어쩌면 오즈 야스지로는 그녀의 제스처 안에서 자기 자신의 작별인사를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꽁치의 맛〉은 오즈 야스지로의 유작입니다
1) 데이빗 보드웰, 오즈와 영화의 시학 (p.308)
2) 로빈 우드, 성 정치학과 내러티브 영화: 할리우드와 그 너머 (p. 94 –138)
3) 조너던 로젠봄, 에센셜 시네마 (p. 146-151)
언급된 영화들
- 늦봄 晩春
- 외아들 一人息子
- 꽁치의 맛 秋刀魚の味
- 고하야가와가의 가을 小早川家の秋
- 동경의 황혼 東京暮色
- 이른 봄 早春
- 가을 햇살 秋日和
- 동경 이야기 東京物語
- 피안화 彼岸花
- 바람 속의 암탉 風の中の牝鶏
- 부초 浮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