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오즈 야스지로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오즈 야스지로: 세계적인 관점들] 심포지엄에서 하스미 시게히코가 발표한 내용입니다.
오즈의 성난 여자들Ozu's Angry Women
부모-영화?
오즈 야스지로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 자리에서 저는 오즈의 영화가 유발하는 웃음이 아니라, 그의 영화에서 묘사되는 분노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오즈의 여자들은 흔히 여성스러운 미덕의 표본이라 일컬어지죠. 허나 저는 그 여자들이 보여주는 분개의 제스처를 지적함으로써 오즈의 미장센의 모던함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미조구치 겐지나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속 여자에 대해선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간 것과 달리, 오즈의 여자에 대한 논의는 드물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그 여성들의 분노에 대해선 어떠한 언급도 거의 없었다고 봐야합니다. 이러한 논쟁의 누락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오즈의 영화를 (특히나 전설적인 배우인 류 치슈가 출연하는 영화의 경우) 항상 등장하는 아버지의 이미지로 기억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형식주의자인 데이빗 보드웰 마저 그의 저서 『오즈와 영화의 시학』에서 〈늦봄〉를 논할때 '오즈는 〈외아들〉의 결말에서 보여진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여전히 고독히 희생적인 부모의 모습을 묘사할 수 있다'며 〈늦봄〉을 부모-영화로 분류했습니다. (1) 오즈의 후기 작품들은 다음과 같은 단어들로 묘사되곤 합니다; 딸을 시집보내는 홀아비의 비애. 그러나 이러한 묘사/요약에서 무의식적으로 억압된 것은 다름 아닌 시집가는 딸 본인이 당연히 느끼는 비애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분노의 몸짓
이렇게 오즈의 영화를 보는 두 관점을 언급함에 있어 한 관점의 손을 들어주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어린 딸이 아버지의 권위를 부정한다는 것 자체의 모던함을 강조하려는 것 또한 제 의도는 아닙니다. 저는 다만 (오즈의 정교한 연출 하에) 여자들이 분노를 표출하는 순간이 흔히 간과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각본 어디에도 여자들이 분노한다는 것은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 (특히나 오즈의 후기작에서) 여성이 분노의 제스처를 펼치는 장면을 여럿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언성을 높이거나 표정을 바꿔 분노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들의 몸짓으로만 감정적 변화를 보여주죠. 이러한 제스처를 위해 필요한 준비물은 평범한 옷/천 한 조각입니다. 오즈의 영화에서 어린 여성이 수건이나 스카프 따위의 소품을 내보이는 순간 저는 긴장합니다. 곧 스크린이 그녀의 분노로 진동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죠. 세 편의 영화로 예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꽁치의 맛〉, 〈고하야가와가의 가을〉, 〈동경의 황혼〉.
목에 두른 수건
〈꽁치의 맛〉에서 배우 이와시타 시마가 청홍색의 수건을 목에 두른 채 다리미질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늦은 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은 이미 어둠으로 뒤덮였죠. 집엔 그녀 외에 누구도 없지만, 열심히 일하는 그를 보는 관객은 어떠한 불균형을 느낄 것입니다. 오즈에게 수건이란 소품은 보통 남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죠. 목에 수건을 두르는 건 미혼의 여자에게 적합한 모양새가 아닙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녀가 일찍 어머니를 여읜 가족의 딸이라는 점입니다. 비록 그녀는 결혼할 수 있는 나이지만, 여전히 홀아비를 위해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와시타의 역은 하라 세츠코가 '노리코'라는 이름으로 연기해온 여성의 이미지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습니다. '노리코'에 대해선 로빈 우드가 [정의에 대한 저항: 오즈의 '노리코' 3부작]라는 저서에서 흥미롭게 연구했죠.
그러나, 하라 세츠코의 역은 (집에 홀로 있을때 조차) 한 번도 수건을 목에 두른 모습으로 등장한 적이 없으며, 〈늦봄〉의 츠카사 요코 또한 그런 바 없습니다. 이와시타와 유사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유일한 배우는 〈이른 봄〉의 아와시마 치카게입니다. 허나 비록 착장은 비슷할 지라도 이유는 다르다고 봐야죠. 이와시타와 달리 아와시마는 〈이른 봄〉에서 회사원의 피곤한 부인 역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오즈의 영화에서 미혼 여성은 흔히 그들의 새하얀 목을 조명에 드러내곤 합니다. 그러나 방금 나열한 여성들 헐렁한 옷차림으로 스크린에 등장하는 했죠. 오즈가 우연찮게 이런 실수를 범할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꽁치의 맛〉에서 이와시타 시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아버지의 둔함
류 치슈가 연기한 아버지가 귀가할 때, 그는 비틀거리며 다리미질하는 딸의 옆을 지나갑니다. 누가 봐도 평소보다 술에 취한 모습이죠. 그는 탁자에 기대며 주저앉고 딸을 엄하게 응시합니다. 영화의 앞부분을 본 사람이라면 이 어색한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실 겁니다. 아버지는 바로 전 장면에서 고등학교 은사의 안타까운 삶을 목격했습니다. 은사가 결혼시기를 놓친 딸과 함께 살며 늙었죠. 이를 본 친구가 류 치슈 또한 조심하지 않는다면 같은 처지가 될 거라 놀리고, 류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이제 그는 집안일을 하는 딸에게 화를 냅니다; '결혼 안 할 거니?' 퉁명한 얼굴로 무응답인 딸에게 짜증이 난 아버지는 결혼 이야기로 더욱 강렬하게 잔소리를 합니다. 그녀가 남자에게 눈길을 줄만한 나이고, 비록 우리는 아버지가 취기가 올라 하는 말임을 알지만 그가 '결혼'이라는 단어를 거듭해 언급해가며 딸에 대해 배려 없이 행동하는 그를 보는 관객은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좀 다르게 반응했으면 하죠. 〈늦봄〉에서의 아버지는 딸이 결혼하도록 본인이 먼저 재혼할 의향이 있다고 연기합니다. 〈꽁치의 맛〉의 아버지는 〈늦봄〉과 같은 정교한 방법을 쓰지 않을 뿐더러, 〈늦봄〉에서 딸에게 보인 (근친상간에 가까울 정도의) 애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던지는 것
딸의 쿨한 반응에 성가신 아버지는 여기 와서 앉아보라 합니다. 오즈는 이 숏을 두 가지의 거리에서 시작합니다. 처음엔 카메라가 딸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잡습니다. 다리미질을 끝내고 세탁물을 갠 뒤 일어나 아버지에게 다가오죠. 그녀가 앉으려고 하자 카메라는 가까이서 딸의 버스트 숏으로 전환합니다. 이때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무표정입니다. 두 번째 숏에서 그녀는 살짝 고개를 젖히어 목에 두른 수건을 떨굽니다.
이 짧은 몸짓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딸의 여성스러운 매력을 드러내는 동시에 아버지의 말에 저항할 것이라는 그녀의 마음을 보여주는 셈이죠. 〈꽁치의 맛〉의 비극은 아버지가 이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는 딸이 수건을 떨구는/던지는 행동이 그녀의 분노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의 둔함을 우리는 용서해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류 치슈가 연기한 아버지라 해도요. 오즈는 분명히 이 장면을 상처받은 딸의 시점에서 연출한 것입니다.
거부
만약 딸의 목에서 수건이 미끄러지는 순간이 간과된다면 이 장면의 의도/의미는 순전히 아버지의 시점에서만 읽혀질 것입니다. 그러나 수건이 떨어지는 순간의 행동의 주체는 딸이었습니다. 오즈는 그 순간을 카메라로 잡기 위해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장면을 시작한 것이죠.
〈동경의 황혼〉에서 아리마 이네코가 스카프를 풀기 위해 했던 몸짓을 보면 오즈의 의도가 확실해집니다.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의 친딸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고, 어머니를 찾아가 진실을 알고자 합니다. 어머니는 그녀와 아버지를 떠나 다른 남자와 살고 있었죠. 사실 이 작품은 전후(戰後) 오즈 영화로선 드문 설정입니다. 차가운 겨울을 배경으로 하죠. 어머니 앞에 딱딱하게 앉은 딸의 얼굴은 마치 얼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달리 어머니는 딸의 예상치 못한 방문으로 행복해보이죠.
딸은 머리를 살짝 젖혀 목을 감싼 스카프를 풉니다. 이 차가운 몸짓은 그녀가 어머니를 거부하고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때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은 〈꽁치의 맛〉에서 이와시타의 얼굴과 일치합니다. 물론 다리미하는 여자가 목에 수건을 두르거나, 추위를 타는 여성이 목에 스카프를 메는 건 흔한 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수건이나 스카프 자체가 아니라, 여자가 이러한 소품을 목에서 푸는 몸짓을 카메라가 잡았다는 점입니다. 오즈에게 이런 제스처는 딸의 분노를 나타냅니다.
무표정의 얼굴을 한 채 각자의 부모님에게 몸짓으로 불신을 표하는 두 여자와 같이 〈이른 봄〉의 아와시마 치카게는 남편을 향해 불신을 표합니다. 영화에서 그녀의 남편은 미혼의 여성과 불륜을 했습니다. 여기서도 오즈는 중요한 순간에 목에서 수건을 푸는 몸짓을 찍기 위해 수건을 목에 두르고 장면을 찍었을 것입니다.
순간의 몸짓
딸의 분노의 대상은 아버지만이 아닙니다. 분개의 몸짓은 어머니와 남편 앞에서도 등장하곤 합니다. 수건이나 스카프를 목에서 푸르는 행동은 놓칠 수 있을 정도로 빨리 지나가지만 장면에 활기를 불어넣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오즈는 표정이나 대사가 아닌, 순간적인 동작을 이용해 불신이라는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오즈의 미장센의 모던함을 봅니다.
사실 이 순간은 내러티브에 있어 의의를 지니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디테일이죠. 그러나 주제적인 관점에서 반복되는 몸짓은 무시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오즈의 영화들이 여성들의 몸짓으로 활기를 띄게 된다는 걸. 여기서 여자들은 수건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일상 소품을 던집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본 것과 정반대되는 몸짓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무언가를 줍는 것이죠.
줍는다는 것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오즈 영화에서 아내는 퇴근한 남편이 옷을 갈아입을 때 도와줍니다. 그녀가 할 일 중 하나죠. 보통 남편은 느긋하게 양복을 벗고 편안한 기모노로 옷을 갈아입습니다. 부인은 남편이 벗은 옷을 하나하나 줍죠.
남편은 셔츠나 자켓 따위를 벗을 때 아내에게 건네주지 않습니다. 다다미에 그냥 떨어뜨리죠. 아내는 허리를 굽혀가며 옷을 우아하게 줍습니다. 그중에서 단연 군계일학은 〈가을 햇살〉의 미야케 구니코입니다.
이 몸짓을 무심한 남편의 오만함으로 보거나, 인내심 있는 아내의 굴종이라 본다면 큰 오독일 것이다. 누가 봐도 오즈는 여기서 과장하고 있다. 오즈는 적합한 순간에 남편으로 하여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리도록 합니다. (의도치않게) 무언가를 떨어뜨리는 어색한 행위는 남자배우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허리를 굽혀 떨어진 손수건을 줍는 여자배우의 몸짓은 우아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부인의 몸짓은 가볍고 유연하기에 누가봐도 남편보다 우위를 점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오즈의 영화에서 여성은 줍는 데 달인입니다. 예로 〈늦봄〉에서 스기무라 하루코를 봅시다. 그녀는 아주 재밌는 몸짓을 선보입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성지의 땅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본 뒤 줍는 장면이죠. 〈동경 이야기〉의 카가와 교코와 〈가을 햇살〉의 하라 세츠코 또한 교실 바닥에서 무언가를 줍는 행위로 평이한 장면에 생기 넘치는 리듬을 불어넣습니다. 오즈는 여자배우에게 이런 제스처를 시키는 걸 매우 즐거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남자배우들에겐 이런 우아함을 허용하지 않았죠.
던져버리는 것
오즈의 몸짓에 의한 논리에 따르면 무언가를 줍는 행위의 반대되는 것은 분노를 의미합니다. 오즈의 영화에선 여자가 들고 있던 물건을 던져버리는 순간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리고 바닥에 내팽개치는 물건은 거의 항상 옷입니다.
〈피안화〉의 다나카 기누요 또한 (〈가을 햇살〉의 미야케 구니코처럼) 능숙한 몸짓으로 퇴근한 남편의 옷을 갈아입혀줍니다. 허나 이때 놀라운 순간이 등장합니다. 딸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은 남편에게 시위라도 한다는 듯, 그녀는 공들여 하나하나 주운 옷을 바닥에 던져버립니다. 〈고하야가와가의 가을〉에서 아라타마 미치요가 연기한 딸은 이미 기혼이나, 아버지의 이기적인 태도에 화가 나 조심스레 옷장에서 뺀 옷을 던져버립니다. 〈가을 햇살〉에서 츠카사 요코가 연기한 딸은 어머니 (하라 세츠코)의 행동을 못마땅해 합니다. 그녀는 어머니 앞에서 방금 자신이 벗은 가디건을 확 던져버리죠. 〈부초〉에서 쿄 마치코가 연기한 유랑 배우 또한 애인이 바람피운 것을 알자 손에 쥐고 있던 수건을 바닥에 던집니다.
이 작품들에서 묘사된 순간적인 분개의 몸짓은 〈가을 햇살〉에 이르러 대사와 표정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오카다 마리코가 아버지 뻘의 남자들을 상대로 마치 최종 변론을 펼치는 검사처럼 말하는 장면이 그러하죠. 그녀의 연설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는 오즈의 다른 영화에서 순간적으로 묘사된 여성들의 분노적 제스처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앉으라 권유한 의자에 앉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기분 나쁜 행동을 무분별하게 비판하며 오카다는 결국 성공합니다. 그들로부터 사과를 받아내고야 말죠 (물론 그녀가 진지해 보일수록 더욱 웃겨지지 만요). 이 장면은 오즈에게 여성의 분노만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인상을 남깁니다.
오즈의 '느림'
조나단 로젠봄의 통찰력 있는 글 '오즈는 느린가?'의 제목에서 볼 수 있다시피 (3), 오즈의 작품들은 흔히 시간의 경과를 느긋한 흐름으로 따라간다 여겨지곤 합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더욱 생각하게 하거나,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법한 디테일은 제거함으로써 이를 이뤄내죠. 〈바람 속의 암탉〉에서 전역한 남편이 아내를 계단으로 밀어버린 장면, 그리고 〈부초〉의 빗속 남자와 여자의 욕설이 오가는 장면에서 볼 수 있다시피 오즈의 영화는 개개인 간의 갈등이 묘사되긴 하나, 흔히 질서가 복원되며 끝나는 것이 특징으로 일컬어집니다.
물론 어느정도 맞는 말입니다. 거의 모든 등장인물은 사건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일을 벌이지 않습니다. 허나 그렇다면 여성들이 수건 따위를 목에서 잡아당기고 갑작스레 옷 따위를 바닥에 던지는 장면들은 이야기의 중심에서 벗어난 에피소드라 봐야할까요? 이러한 제스처는 강조된 분노의 묘사라기보다, 내러티브에 어떠한 변화도 만들지 못하는 순간적 시각 이미지라고 보여집니다.
작별의 의식
그러나, 〈동경의 황혼〉에서 아리마 이네코가 (어머니 앞에서) 목에 두른 스카프를 잡아당긴 그 날, 그녀는 자살 사고에 의해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부모님께 (몰래) 낙태를 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말이죠. 이것은 그녀의 제스처가 피할 수 없는 내러티브적 변화를 예견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꽁치의 맛〉의 이와시타는 어땠을까요?
여기서도 우린 중대한 사건을 지나쳐선 안 됩니다. 그녀가 아버지와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 채, 결혼할 것이라 체념한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은 매우 유사한 〈늦봄〉의 마지막 장면과 비교할 때 더욱 뚜렷해집니다. 요시다 기주가 자신의 저서 〈오즈의 안티-시네마〉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두 작품은 일종의 반복이지만, 둘의 차이가 매우 두드러진다는 것이죠. 둘의 차이점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대목은 다음 두 대목입니다; 1) 〈꽁치의 맛〉에서 결혼식 날 아침에 차려 입은 딸과 아버지의 이별 장면이 매우 건조하게 찍혔다는 점, 그리고 2) 그날 저녁 홀로 남은 아버지를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 그러합니다. 요시다에 의하면 이것은 '아주 따분하고 비예술적이며 단조로운 이미지’입니다.
〈꽁치의 맛〉을 찍을 시점에 오즈는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홀아비가 딸을 시집보내며 느끼는 비애의 이야기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으며, 픽션에서조차 되풀이될 수 없다는 것을. 이와시타 시마가 아버지 앞에서 수건을 잡아당길 때 어쩌면 오즈 야스지로는 그녀의 제스처 안에서 자기 자신의 작별인사를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꽁치의 맛〉은 오즈 야스지로의 유작입니다
1) 데이빗 보드웰, 오즈와 영화의 시학 (p.308)
2) 로빈 우드, 성 정치학과 내러티브 영화: 할리우드와 그 너머 (p. 94 –138)
3) 조너던 로젠봄, 에센셜 시네마 (p. 146-151)
언급된 영화들
- 늦봄 晩春
- 외아들 一人息子
- 꽁치의 맛 秋刀魚の味
- 고하야가와가의 가을 小早川家の秋
- 동경의 황혼 東京暮色
- 이른 봄 早春
- 가을 햇살 秋日和
- 동경 이야기 東京物語
- 피안화 彼岸花
- 바람 속의 암탉 風の中の牝鶏
- 부초 浮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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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 미키오는 일본 영화에서 오즈 다음으로 와야 할 이름이다. 올해 초 진행된 그의 회고전을 다니며 그의 영화를 볼때마다, 그에 대한 세계의 뒤늦은 발견을 대신해 사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름들과 같이, 그는 무성영화로 영화 만들기를 시작한 사람이다. 유성영화에 이르자 그는 대사를 없애고 그 자리에 본인만의 제스처와 시선을 넣는다. 침묵이 흐르는 자리에 대사를 대신하는 눈빛과 손짓이 일상적 공간과 만나 (혹은 그 공간을 의도적으로 피함으로서) 하나의 '영화적 사건'이 된다. 이런 영화적 사건은 나루세의 현대적 가치관과 맞물려 그 힘을 발휘한다. 나루세는 그 누구보다도 개인으로서의 자립을 지지한 사람이 아닐까 하기 때문이다. 오늘 소개할 〈흐트러진 구름〉의 유미코가 계속 되풀이 하는 대사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돈을 더 이상 받고 싶지 않아',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등). 또한 이 영화에서 남편의 가족이 주인공을 밀어낸 것은 어떻게 보면 그녀로 하여금 억지로 맺어진 혈연 관계를 벗어나 개인으로서 서게 하는 역할이라 볼 수 있다. 이의 연장선에서, 결국 이어지지 못한 사랑은 절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어긋난 시선의 순간은 가슴 아픈 순간이지만, 서로에게 행복을 비는 아름다운 순간이기도 하다.
나루세의 영화에서 개인으로서 자립한다는 것은 영화에서 개인의 단위로 사유하는 것과 연결된다. 다시 말해 이어질 수 없는 혹은 이어지지 말아야 할 파토스의 선이 서로 만나려 할 때, 그 둘은 어긋나야 하며 인물들과 관객들은 어긋난 선 사이 균열을 응시해야 한다. 그 응시를 통해서, 서로의 간극을 인정할때 비로소 자립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사유는 단순한 멜로드라마의 형태로 나타난다. 나루세의 영화는 결국 멜로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단순한 문장이 나루세의 위대함의 반증이다. 영화는 거의 정의가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매체기에, 자신만의 정의를 찾은 감독은 위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 단순히 성립하는 영화는 위대하다. 나루세의 영화는 결국 '남자과 여자'로만 성립되기 때문에 위대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루세의 영화에는 항상 '남자와 여자'로 치환되는 순간이 등장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지위와 사회적 관계 등의 기호가 지워짐으로서 불가능한 남녀의 사랑을 가능케 보이도록 하는 순간이 생기는 셈이다. 〈흐트러진 구름〉에서 그 순간은 유미코가 미시마를 간호해주는 장면이다.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아픈 남자와 그의 손을 꼭 잡는 여자의 '정'이 폭풍과 번개가 반짝이고 울리는 바깥의 '동'과 대비되며 만들어내는 나루세적 스펙터클에서 그의 정수를 맛보았다. 사실 이 장면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전개를 지적하는 이도 있지만, 어쩌면 무모할 정도로 '남과 여'를 끌어와 자신의 영화로 만든 이 결정은 나루세가 자신으로부터 달아나는 삶을 붙잡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작품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결국 이 작품의 그의 유작으로 남게 되었다).
〈흐트러진 구름〉은 다른 나루세의 영화가 그렇듯이 가늠하기 힘든 깊이를 지닌 우물과 같다.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의 차이에서 비롯된 이 우물은 표면과 내면의 긴밀한 숨박꼭질로 번지게 된다 (이 숨박꼭질은 쇼트와 시퀀스 단위에 멈추지 않는다. 〈흐트러진 구름〉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시간과 순간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음을 떠올리면 된다). 여기서 나루세가 보여주는 얌전해보이는 표면 속엔 아련함, 죄의식, 섹슈얼리티가 끓고 있다. 생활 공간 속에서 남녀가 앉고 일어나는 것, 앞뒤를 오가며 앞을 바라보고 뒤돌아 보는 것 모두 단순히 그 행위를 넘어 함의를 띄고 있다. 이렇게 시각적 함의로 주어지는 영화적 감흥이야 말로 나루세의 영화가 지니는 가장 큰 힘 중 하나다. 이런 감흥이 등장하는 대표적 장면은 미시마가 집에서 여자친구와 만나는 장면이다. 여기서 두 남녀는 일반 가옥에 있지만, 마치 무대에 오른 사람들처럼 지속된 동선의 변화로 앞과 뒤, 좌우가 바뀐다. 그러던 와중 여자가 함께 아오모리에 가지 못한다고 하니 카메라는 창 밖으로 나가며 둘을 창틀로 갈라놓는다. 이별을 선언한 여자는 갑자기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는데 이때 둘의 눈이 맞는다. 둘의 시선을 담은 미디엄 쇼트가 연이어 등장하고 카메라가 다시 창 밖으로 나가 우리에겐 닫힌 커튼 밖에 보이지 않는다. 단 한 번의 노출도 없이 이렇게 애절하고 야릇한 분위기를 단숨에 만들어내는게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가 가지는 힘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둘의 관계로 이어지지 않는다. 남자가 커튼을 제끼고 창문을 연다. 이때 말은 한번도 오가지 않는다. 그의 뜻을 아는 여자는 말없이 핸드백을 집고 나간다. 이때 그녀는 열쇠를 놓고 간다. 일시적 이별이 영원한 결별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다시 보니 이별을 이렇게 잡는 감독은 몇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루세에겐 무성영화로 시작한 감독만이 지닌 감각이 있다. 그건 달리 말하자면, '말'과 '소리'의 차이를 아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흐트러진 구름〉이다. 무엇이 구름을 흐트러지게 했을까? 바로 '소리'이다. '말' 없는 인물들은 침묵을 유지하는데, 외부의 소리가 구름을 흩어지게 하는 것이다. 영화를 지배하는 사건이지만 이미지로 보이지 않는 '남편의 교통사고'를 보자. 정작 그 사건의 이미지 자체는 생략되었지만 그의 여진이 진동하는 이 영화의 방식은 관계나 노출의 순간이 없이 두 남녀 간 에로스를 다루는 나루세의 영화 그 자체와도 같다. 시끄럽게 점멸등 소리가 울리고 유미코는 버스에 탄다. 바로 다음 쇼트에서 그녀의 형부는 유미코의 남편이 사고를 당했다는 전화를 받는다. 생략된 사건, 혹은 생략된 이 이미지는 작품에서 두 번 재현된다. 첫번째 재현은 유미코가 낙태 수술을 위해 마취할 때인데, 여기서 화면은 페이드 아웃하고, 그녀의 이름을 외치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즉, 그녀의 상상이다). 두번째 재현에선 불길의 전조 같이 다시 한번 울리는 점멸등의 소리가 남녀의 침묵을 파고든다. 이로부터 대사가 없다시피한 시퀀스가 진행된다. 영화의 초반부에서도 보여지듯이 자동차로 이동하는 순간들은 모두 과거를 소환하는 성격을 지니는데, 이 시퀀스는 자동차의 움직임으로 과거를 소환하는 동시에 현재의 고뇌를 끄집어내고 불가능한 사랑의 미래까지 예견케 한다. 남편의 교통사고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목격하는 남녀는 말없이 어긋난 시선으로 침묵을 유지할 뿐이다. 유성영화가 발명한 것은 결국 '침묵'이다.[1] 나루세는 누구보다도 침묵의 순간들이 얼마나 애절하고 가슴아픈지 아는 사람이며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그것의 가장 아름다운 예일 것이다.
이때 떠오르는 영화는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이다. 나루세와 로셀리니는 다른 단위와 방식의 사유를 통해 같은 이미지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먼저 두 영화는 여자의 과거 여행으로 이뤄져 있다. 한 영화에선 나폴리의 유적, 유산을 찾아가는 여자가 등장하고, 한 영화에선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과거로 시간 여행을 경험하는 여자가 등장한다. 타지의 과거와 자신의 과거, 이 두 여행에서도 명백한 것은 문명의 근심을 진 사유를 하는 로셀리니와 달리 나루세는 지극히 개인의 관점에서 사유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로셀리니가 나루세보다 위대하다는 주장의 근거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영화는 연달아 목격하는 죽음의 이미지에 다른 반응을 보인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손을 잡은 두 남녀가 죽음의 순간에 보존된 모습을 봤을때, 문명의 짐을 지닌 두 남녀는 세상과 화해해야만 했고, 재결합 해야'만' 했다. 반면, 〈흐트러진 구름〉에서 여자가 여관 앞에서 자살한 남녀를 보는 순간 영화는 남자와 여자 사이 희미한 선을 그린다. 그러나 둘이 함께 죽음의 이미지를 맞이한 순간, 그 희미한 선은 끊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살기 위해 이어지지 말아야 할 선은 끊어져야 한다.
그러면 이제 끊어진 선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공간을 말할 차례다. 나루세의 영화에서 생활하는 공간, 일본적인 공간은 오즈와 다르며,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항상 앉아 정면가슴 아래 높이를 비추는 카메라의 방향으로 말을 건네는 오즈의 인물들과 달리, 나루세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앉았다 일어나를 반복하며 그 자체로 영화적 제스처를 형성한다. 이런 제스처의 베경이 되는 곳은 일본식 공간이자, 생활공간으로서 문으로 연결된 두 방, 다다미방으로 대표된다. 이때 주목할 만한 것이, 이 영화에서 단 한번도 유미코의 집 안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가 자신의 집 속 다다미방에 앉아있는 모습을 우린 단 한번도 보지 못한다 (심지어 그녀가 혼자 집 안에 있는 모습을 보여준 후, 집에서 나오는 쇼트를 의도적으로 보여줌으로서 그녀가 온전히 있던 공간은 원래 살던 가정의 집이 아니라고 못박아둔다). 영화의 이런 결정은 어쩌면 그녀도 제목처럼 항상 떠다닐 구름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고 되묻게 만든다. 이런 질문도 잠시, 영화의 인물들은 이 초반부를 제외하고 거의 항상 여관에서 지낸다. 이때, 이 여관또한 두 방이 연결된 생활 공간으로서 공간 내의 연속성이 보장되어있다. 이런 공간은 나루세의 영화에서 '남과 여'의 애정을 서로 확인하기에 걸맞은 공간이 되기 어렵다.[2] 허나, 영화에서 둘의 파토스가 모아진 공간도 다른 지역의 것이긴 했지만, 여관이었고 마지막 서로의 간극을 인지한 공간도 여관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의문을 가질 만하다. 이때 나루세는 주의깊게 보라고 말한다. 전자의 공간은 여관이지만 의도적으로 외부의 풍경과 대비시켜 고립된 공간임을 명시할 뿐만 아니라, 방 안에서의 연속성이 제시되지 않는다. 반면, 후자의 공간의 마지막 쇼트, 즉 남자가 여자에게 행복을 빌며 노래를 부르는 쇼트에서 우린 방 안의 공간을 연결하는 문 틀 사이로 두 남녀를 본다. 연속된 공간임을 긍정하는 동시, '남과 여'로 치환됨을 부정하는 순간인 것이다.
나루세의 영화는 결국 '시선의 영화'이기도 하다. 시선이 만들어내는 드라마, 이는 시선으로 인해 감정이 촉발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촉발된 이후에는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킨 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3] 서로를 바라봐서는 안되는 인물들이 그 불가능함을 인정하게 되는 마지막 순간은, 앞서 말한 공간의 드라마라는 측면 뿐만 아니라, 이런 시선의 드라마에 있어서 지극히 나루세적인 순간이다. 그래서 온전한 사랑은 지나온 과거에만 머물어 있는 셈이다 (계속해 남편을 추억하는 유미코의 플래시백, 미시마의 전 여인이 남긴 열쇠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이런 과거를 제시하는 순간들이다). 먼저 시선의 어긋남은 제스처의 연장선에서 볼 때, 좌식 생활에서 앉고 서는 제스처의 어긋남과 연결된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남자가 노래를 부르는 마지막 장면 바로 전에 등장하는 장면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재확인한 여자는 주저앉고, 남자는 선 채로 뒷걸음친다. 또한 시선의 교환은 (혹은 그 교환의 불가능함은) 더 큰 의미에서 (일본) 사회와 그 안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피로감에서 유발되는 것이며 인물들은 이를 계속해 되뇌인다 (둘 만이 남아 비를 피할 때, '왜 우릴 쳐다보는거야? 범죄자도 아닌데'라 말하는 미시마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이렇게 잔인한 고통에 대해 유운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란 시선들로 짜인 감옥이며 (나루세적) 연인들은 연인이 되기 위해 오직 그들만이 시선을 교환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어디론가 간다'.[4]
자신을 바라봐 주길 원하는 남자의 노래, 허나 차마 바라볼 수 없는 여자의 모습, 이 가슴아픈 선율과 이미지가 함께 등장하는 순간 관객은 고개를 떨군 여자를 주목하게 된다. 시선의 교환이라는 가능성은 나루세 특유의 서스펜스를 상기시킨다. 과연 둘은 마지막으로 서로를 마주볼까? 그러는 순간, 마치 초반부에서 닫힌 커튼이 열리던 순간처럼, 쇼트가 문틀에 걸친 것으로 바뀌며 그들이 있던 여관이 연속된 공간, 필연적으로 '남과 여'가 거부되는 그 나루세적 공간이었음이 드러난다. 시선의 드라마가 공간의 드라마와 만나는 이 순간, 나루세는 마지막으로 둘이 서로를 응시함은 없을 것이라 보여주는 셈이다.
결국 남자는 전차를 타고 떠나며, 라호르로 갈 것이다. 그를 떠나보낸 여자는 홀로 강을 바라보며 서 있는다. 나루세라는 위대한 시네아스트가 남긴 마지막 이미지, 하나가 될 수 없었던 남녀가 각자의 길을 가는 것, 남자를 떠나 보낸 여자가 '떠다니는 구름'이 아님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1] 로베르 브레송,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
[2] 하스미 시게히코 · 야마네 사다오, 『나루세 미키오』
[3],[4] 유운성, 〈하나의 시선을 위한 퍼포먼스: 나루세 미키오에 대한 노트〉
언급한 영화들:
- 흐트러진 구름 (乱れ雲, 1967)
- 이탈리아 여행 (Viaggio in Italia,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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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은 한 남자가 원의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지상에 발이 닿자 먼 사막의 지평선을 따라 걸으며 시작한다. 원의 기호에 의해 느려진 직선 (수직-수평의) 운동은 원에 대한 직선의 억압을 예고한다. 아랑님의 지적처럼 〈동맹〉에서 저메키스는 랑에 대한 결산을 펼치고 있다. 그 중심엔 원을 압박하는 직선 벡터들이 넘친다.
맥스와 마리안은 함께 원을 그리고 싶은 인물들이다. 그러나 영화의 주된 힘은 파국을 향한 추락의 동선을 그리고 있다. 오프닝에서 유려히 내려오는 맥스를 원의 낙하산이 지탱한 것처럼, 남녀가 이루려는 원이 가파른 추락 운동의 속력을 그나마 줄이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본다. 원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느리게 떨어지는 감각은 영화에서 비행기가 유이하게 등장한 두 씬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마리안의 파티에 폭격 당한 비행기가 어설픈 원을 반쯤 그리다 추락하는 순간의 동선은 맥스가 운행한 비행기가 착륙하는 장면과 일치한다.
이때 둘이 ‘원’을 그리고 싶다함은 굳이 랑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영화에서 여러번에 걸쳐 가시화되고 있는 바다. 직접적으로 제시된 장면은 모래 폭풍 속에서 관계를 가지는 장면일 것이다. 둘이 처음으로 ‘결합’하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무척이나 파편화된 숏의 붙임으로 온전치 못한 결말을 암시하고는 있지만) 원의 움직임을 그리고 있지 않던가. 이 장면 바로 전에 등장하는 씬에도 마리안과 맥스가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데, 이 장면은 급작스럽게 컷 전환되는 거의 유일한 장면이다.
영화가 온전한 원을 그리게 냅두지 않자, 두 인물은 그들의 욕망을 간접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려는 듯 계속해 뒤를 돌아본다. 물론 이 몸짓은 온전한 상태에 항상 놓이지 못하는 그들의 상태를 대변하는 역할도 있다 (저메키스는 흔히 쓰이는 표현 - look over one’s shoulder - 를 의식하고 넣은 것 같다). 허나, 우연이라고 보기 힘든 이유는 반복된 몸짓이 영화에 걸쳐 두 인물로 하여금 필연적인 반원을 그리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순간들을 한 번 나열해보자.
1) 마리안: 맥스와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에 말없이 직감적으로 왼쪽으로 틀어 뒤를 돌아보고 맥스를 확인할때
2)맥스: 뒤를 돌아보며 인사하라는 마리안의 지시에 따라 왼쪽으로 틀어 뒤를 돌아보며 인사할 때 (자신을 예전에 심문한 나치군에게 목격됨)
3) 맥스: 방에서 나가려던 와중 인산의 화학식을 써보라는 나치 장교의 명령 때문에 오른쪽으로 돌때
4) 맥스: 문을 열려고 하자 자기 상사가 이름을 부르며 세우자 오른쪽으로 돌아 그를 확인할때
5) 맥스: 마리안이 죽기 전 사랑한다 말하기 위해 부르자 왼쪽으로 뒤를 돌아선다.
여기엔 몇 가지 규칙과 예외가 있다. 먼저, 마리안의 호명에 의해 이뤄지는 몸짓은 모두 직접적인 파국/폭력과 이어진다. 마리안이 뒤돌아 인사하라 지시하자 그에 따르는 맥스가 나치군의 눈에 발각되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장면에 마리안이 “사랑해요 퀘벡씨 (Je t'aime, le québécois)” 라 말하며 총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기 전에도 맥스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돌아보게 만든다. 이 순간들에 맥스는 마리안의 첫 제스처를 되풀이하려는 듯, 같은 왼쪽 반원을 그리고 있기도 하다.
이와는 반대로 마리안의 부름과 상관없이 맥스 혼자 자신의 육신을 통해 이루는 몸짓은 모두 처음 마리안이 자신을 돌아보며 그린 왼쪽 원의 반대다 (마리안이 그를 부르는 두 순간 모두 그는 그녀와 같은 몸짓을 보인다). 의도된 것처럼 맥스의 제스처가 마리안의 첫 몸짓과 반대의 동선을 그리며 오른쪽을 향한 반원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두 육체가 밀접해 있을때 원을 직접 그리려 하자 영화가 그를 방해하거나 끊으니, 둘은 육체가 떨어져 있을 때 원의 윤곽을 함께 그리려는 것처럼 행동함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뒤돌아 보는 제스처는 영화의 수많은 등장인물 중 이 둘만이 선보이고, 그 중에서도 한 번을 제외하면 모두 맥스에 의해 이뤄지는 몸짓이라는 점은 우연이라 보기 힘들다. 뒤도는 행위엔 항상 보는 것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보는 것’은 여러 인물 중 특히 맥스에게 중요한 행위다. 맥스는 끊임없이 거울/창문으로 자신과 마리안을 본다. 이때 자기 자신을 보는 순간, 혹은 카메라가 거울로 맥스를 비추는 숏에 맥스의 얼굴과 육체는 항상 온전한 정면으로 보여진다. 말하자면 맥스는 자신의 얼굴을 투명하게 카메라에 드러내는 사람이다. 그는 마리안의 연기력을 지니지 못하며 자신의 감정과 방법을 쉽게 드러내는 사람이다. 영화에서 둘이 처음으로 만난 후 이어지는 서너 장면이 맥스가 마리안에게 ‘연기’를 배우는 장면이라는 점은 이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다.
반면 맥스가 마리안을 거울로 바라보거나 훔쳐보는 순간들에 마리안의 얼굴은 옆모습만 보이거나 여러 거울에 비춰진 육체로 드러난다. 정체를 숨기고 ‘연기’함으로서 마리안이 얻어낸 형상 혹은 이미지에 매혹되는 맥스의 모습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은 둘이 처음으로 모임에 함께 가는 장면이다. 이때 카메라는 매력을 뽐내는 마리안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는 맥스의 모습을 반사된 거울로 담고, 마리안의 얼굴은 여전히 옆모습만 보인다.
마리안이 거울에 온전한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는 데도 예외는 있다.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마리안의 파티 장면에서 맥스는 동료로부터 마리안에 대한 조사와 의심이 모두 테스트가 아닐까하는 조언을 듣게 된다. 맥스는 이 의문점에 대해 여러번 상사 프랭크에게 물어보고, 끝내 프랭크가 테스트가 아니라고 말하자 (마리안에 대한 의심이 진짜라고 말해주자) 맥스는 처음으로 거울에 비춰진 마리안의 온전한 얼굴을 보게 된다.
〈동맹〉은 이야기 속에서 뒤를 돌아봐야 하는 인물들이 필연적인 함께 원을 그리는 와중, 영화가 파국을 향해 추락하며 끌어당기자 원을 그리며 떨어지는 기이한 영화다. 그렇기에 맥스가 마리안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는 두 장면 (영국군 본부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장면과 디에프 지역 교도소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숏,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숏들과 영화의 마지막 씬이 떠오른다. 이 가슴저린 장면에서 맥스가 탈출을 꾀하며 시동을 건 비행기 프로펠러는 원운동을 그린다. 이 원운동을 저지하여 천천히 멈추도록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차의 직선 운동이다. 이 숏들은 예고된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랑적 인물의 원을 억압하는 직선적 벡터가 형상화되는 영화적인 순간이다. 이 때 날 수 없는 비행기는 영화에서 두 번에 걸쳐 등장하는 비행기의 (동일한) 동선을 상기시킨다. 맥스와 마리안은 어설픈 원을 그리며 추락하는 비행기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언급한 영화
- 얼라이드/동맹 (Allied,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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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소위 말하는 '거장' 영화 감독들의 위대함은 결국 그들의 영화와 세상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르누아르는 '실제'의 이질적 묘사를 통해 '실재'의 층을 발견해내는 감독일 것이다. 그의 영화들은 (특히나 이른 시기에) 희극과 비극, 희망과 좌절을 오가며 인간을 연민하고 긍정한다. 바쟁은 그를 두고 매우 역설적인 표현을 썼는데, 그의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어긋남의 영화'와 '현실에 대한 영화'로서 일 것이다. 그말인즉슨 '현실세계에 대한 더 그럴듯한 묘사는 그 현실세계가 더 많은 것을 의미하도록 하기 위해서일 때만 비로소 의의를 갖는다. 영화에서의 진보는 바로 이러한 역설 속에 존재한다'[1]이다. 어긋남의 영화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묘사의 의의와도 연결되는데, 르누아르의 영화엔 기존의 구도, 윤리와 체제로부터 일탈함으로서 이질적 계층을 드러내는 것,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된다.
자연을 바라보는 것은 먼저 인물로부터 나온다고 르누아르는 믿었다. 그렇기에 그의 인물들은 각자 자신의 리듬대로 행동한다. 해방된 인물들의 고유 리듬을 모두 담으면 상식적으로 불협화음이 되어야 정상일테지만, 르누아르의 영화에선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초기의 르누아르야 말로 이런 인물이 처한 배경의 전조처럼 흐르는 소리의 이동과 사이에 오가는 시선이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그래서인지 르누아르의 그의 초기 토키 영화들과 말년에 찍은 작품들에서 그의 정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앙드레 바쟁 또한 1950년대 르누아르가 미국에서 찍은 영화들에 대한 오해를 인정할 정도로 이 두 시기는 겉으로 볼때 괴리가 있을 수 있을 수 있지만, 후자의 '인공적인' 무대 위 펼쳐지는 '연극'이야 말로 르누아르가 추구한 것이 아닐까한다. 르누아르는 우리가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들, 겪지만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난장판에서 자신과 관객에게 매혹시켜 다시금 인식하게 해주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익사 직전에 구조된 부뒤〉는 마치 르누아르의 전작인 〈암캐〉의 마지막에서 이어지는 듯한 영화다. 여기서 르누아르는 (인물의) 인간적인 면모가 외설적이고 풍자적인 그것과 같다는 것을 안다. 〈부뒤〉에는 부르주아인 레스탕그와 가문의 집과 불로뉴 숲이라는 두 무대가 크게 등장한다. (프롤로그를 제외하면) 하나의 연결 고리 없이 분리된 이 두 공간으로 진행된다. 영화의 프롤로그는 이러한 두 공간이 등장하기 전에 짧게 붙여진 숏으로, 사랑놀이를 하듯 쫓는 프리아포스와 쫓기는 님프의 (아마도 로티스) 연극 무대다. 디졸브되어 본격적인 영화의 화면이 등장하고 레스탕그와씨와 그의 하녀 안-마리가 등장한다. 레스탕그와씨는 에로스를 찬양하며 하녀에게 고백한다. 오프닝부터 그는 자신과 하녀의 관계를 프리아포스와 님프의 그것에 빗대 생각하고 있다. 이때 프롤로그의 '연극' 장면의 의도적인 '평평함'은 디졸브 이후로 등장하는 쇼트들, 특히 레스탕그와씨가 홀로 2층에 올라가 창문을 열어 원근감의 깊이로 하녀가 비춰지는 쇼트와 확연히 다르게 설계되어 있다. 여기선 창문과 그 틀이, 문과 그 틀이 포터스와 함께 원근감을 형성하며 분절하고 나눈다.
이제 영화는 불로뉴 숲으로 그 무대를 옮긴다. 천천히 연못 위에 떠다니는 연못배를 보며 우린 다른 리듬의 공간으로 왔음을 직감한다. 바로 이런 숲이라는 열린 공간의 무대에서 부뒤가 등장한다. 갑자기 그가 안고 있던 강아지는 떠나고, 카메라는 찾아 방랑하는 부뒤의 육체를 따라다닌다. 여기서 영화는 한 번 더 돌아가, 다시 레스탕그와 가문의 책을 파는 본업을 보여준다. 분리된 두 공간과 인물들의 선이 서로를 교차하게 되는 장면은 바로 파리의 거리를 걷는 부뒤가 등장하면서다. 전혀 관계 없어보이던 두 계급의 인물들은 파리의 거리에서, 영화로 만나는 것이다. 늘 그렇듯이 거리의 풍경을, 그 속의 여자들을 훔쳐보던 부르주아의 행동은 놀림거리로 여긴 이상한 육체를 발견하며 뒤집힌다.
망원경으로 이런 육체를 발견하는 것은 레스탕그와만이 아니다. 이것은 르누아르 본인의 발견이자 관객에게 눈을 빌려줘 발견을 유도하는 것이다. 마치 오묘한 시점 쇼트처럼 등장하는 이 쇼트를 두고 르누아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셸 시몽은 정말로 방랑자 중에 방랑자와도 같았다. 난 그와 같은 방랑자가 파리지앵 사이에 어울릴 수 있을지 궁금했고, 이를 위해 매우 긴 렌즈를 준비했다. 마치 아프리카 초원 가운데 멀리서 사자를 찍을 때 쓸 법한 렌즈 말이다. 난 이 렌즈로 사자를 찍는 대신 미셸 시몽을 2층 창문에서 찍었다. 사람들은 파리의 거리를 활보하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이런 방식으로 여러 장면을 찍었다.'
이 오묘한 숏은 세느 강과 파리를 바라보는 평면적인 화면으로, '거짓된 깊이를 촉각적 환경으로 바꾸려는 르누아르의 몸직임이고 이는 르누아르의 영화의 생생함'이다.[2] 여기서 말하는 '촉각성'은 평평한 배경에 놓인 피사체들이 다투어 눈에 들어오는 경험의 일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촉각성은 르누아르의 영화에 대한 관능적인 태도의 반증이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두 배경적/사회적 세계가 만나는 순간을 거리감이 없어진 바탕 위에 담는 것이 결국 그 흔적을 셀룰로이드에 남기는 것이라 보는 셈이다 (이 행위는 부뒤와 엠마가 처음으로 관계를 가지는 순간 카메라가 그들을 피해 벽화를 비춤으로서 피사체의 육체의 생생함 앞에서 눈돌리어 역으로 계급을 없애고 역설적인 육감의 체험을 제공하는 것과 연결된다). 이 흔적의 촉각성의 증거와도 같은 파리지앵 무리는 정말로 르누아르의 영화에서 그렇듯이 희망과 절망을, 희극과 비극을 동전의 양면처럼 느껴진다. 이들은 정말로 그냥 ‘일반’ 관중 무리였다. 그들은 영화에서 나온 것과 달리 자살한 사람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영화 촬영을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부뒤의 자살 시도를 목격하는 사람들을 보고 안-마리가 마치 서커스를 본 듯이 '사고다!'라며 해맑게 외치는 것은 애초에 르누아르가 그들의 연민을 담아내려는 것이 아니었고, 스펙터클에 사로잡힌 얼굴들을 담아내려 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부르주아 가정 안으로 들어온 부뒤는 무질서의 질서로 산다. 레스탕그와 씨의 부인 엠마는 그를 야만인이라 부르고 부뒤는 그녀의 정반대 행동을 하며, 발자크의 『결혼의 생리학』에 침을 뱉기도 한다. 침을 뱉고 싶을 때 침을 뱉고, 자고 싶을 때 자는 부뒤에게 전환점이 오는 시기는 안-마리로부터 키스를 받고 싶다 밝히는 순간이다. 그녀의 말을 따라 미용실에서 덥수룩한 수염을 자르로 용모를 갖추고 등장한 그는, 레스탕그와 씨가 된 듯 엠마(레스탕그와 씨의 부인)에게 자신의 욕정을 드러내보인다. 이때 부뒤는 항상 그랬듯이 육체의 유희를 추구하는 셈이다. 그가 그녀와 관계를 갖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트럼펫을 부는 주아브병의 그림을 보여준다. 희미하게 외부의 사운드가 들리기 시작하고 영화는 아예 밖의 공간, 파리의 거리로 이동하더니 다시 집 안의 그림이 등장한다. 밖의 소리가 안으로 침입하듯이 등장해 흥분의 관계를 암시한 뒤, 계속된 소리와 사람들의 난장판이 영화 속 이야기의 어긋남(부르주와가 부뒤를 쫓아내려는 순간 그의 부인이 관계를 가지고, 목적과는 정반대의 일로 부르주와가 표창장을 받게 되는)으로 이어지는 시퀀스는 지극히 르누아르적이다.
그렇기에 〈부뒤〉를 너무나 손쉬운 부르주아 풍자극이자 레스탕그와 씨에 대한 공격으로 보는 것은 르누아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부뒤〉는 단순히 무질서를 옹호하는 것도, 질서를 공격하는 영화도 아니다. 레스탕그와씨는 모순도 많지만 다른 사람에게 연민을 비추기도 하고, 무엇보다 영화에서 부뒤는 그가 되고 싶어하는 또 다른 자아처럼 느껴지기에 그렇다. 후에 그가 부뒤와 안-마리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볼 때, 그 둘의 관계를 두고 (프롤로그에 등장한) 자신의 상상과도 같았던 프리아포스와 님프의 그것에 빗댄다는 점에서 비춰지는 바이다. 되려, 이 영화는 흥분의 공간인 도시와 자연, 그리고 그 둘을 잇는 파리와 (파리지앵이 부르는) 노래를 보여준다 (하스미 시게히코가 쓴 표현 '성기로서의 도시'는 얼마나 적절한가!). 영화가 끝나는 지점의 두 쇼트는 정작 부뒤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우리가 보는 것은 양 옆으로 엠마와 안-마리를 안고 있는 레스탕그와씨의 모습과 영화의 주제곡을 부르는 방랑자들의 모습이다. 프랑스 문화에 익숙하면 두 여자를 낀 레스탕그와씨의 이미지에 익숙할 것이다. 흔히 'ménage à trois (3명의 가정)'이라 불리는 관계의 표상과도 같은 이미지다. 이를 잇는 마지막의 이미지는 파리의 거리를 행진하듯이 '흥분'의 노래를 부르는 방랑자들의 모습이다 (이 '흥분의 노래'는 이상할 정도로 영화에서 거듭해 등장하며, 서로 알지 못하는 인물들이 마치 몰래 약속했다는 것처럼 같이 이 노래를 부르곤 한다).
이때 언급한 노래와 함께 다양한 음악/노래의 배치는 토키 영화로서의 〈부뒤〉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암캐〉와 반대 지점에 놓인 듯한 이 영화의 사운드 사용이 그가 토키 영화를 만든지 몇 년 되지 않아 이뤄지고 있음은 르누아르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기서 디제시스의 안(또는 밖)에 놓인 음악이 거듭하며 반복된 후 다른 위치에 놓이는 사운드 배치를 즐겨 쓰며 이 사운드의 이동은 부뒤의 경로와 매우 유사하다. 이의 가장 대표적 예는 극에서 등장하는 플룻 연주다. 이때 플룻 연주는 디제시스 내부의 소리와 외부의 소리의 경계로 작용하는, 일종의 연극 무대의 대목을 가르는 것처럼 제시된다. 연극의 막(act)을 나누듯이 등장하면 일반적으로 디제시스 외부의 소리일텐데, 〈부뒤〉의 플룻 연주는 의도적으로 그 연주자를 카메라에 담아 이를 디제시스 내부의 소리로서 주관적인 사운드의 위치에 놓는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 플룻 소리가 처음부터 디제시스 내부의 소리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플룻 소리는 프롤로그에서 디제시스 밖의 소리로 가장 먼저 등장했다. 이때 우린 당연히 연극 무대의 소리라 여기고 객관적 사운드에 놓이지만, 영화가 '현실'로 입장하며 주관적 사운드로 바뀌는 것이다.
플룻 소리의 등장은 영화의 러닝타임에 걸쳐 5번 등장한다;
1) 디제시스 밖: 영화의 타이틀 카드와 함께 화면에 등장
2) 디제시스 안: 플룻을 부르는 사나이가 나오며 파리의 숏이 이어짐
3) 디제시스 안: 부뒤가 구조된 날의 밤에 같은 남자가 창가에서 플룻을 부름
4) 디제시스 안: 다음 날 아침 씬이 시작하기 전 동일한 남자가 창가에서 플룻을 부름
5) 디제시스 밖: 파리의 거리에 서 있는 부뒤만이 숏에 등장하며, 창가의 남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음.
처음처럼 다시 객관적인 사운드의 위치에 놓이는 때(플룻 연주자가 등장하지 않고 마치 영화의 공간 밖에서 소리가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목)는 레스탕그와 씨의 집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 즉 등장인물 모두의 불륜과 욕정이 발각나는 장면의 전조로 흐를 때이다. 〈부뒤〉에서 (특히 플룻의) 음악은 부뒤처럼 흥분과 욕정의 전조로, 주관적 사운드가 객관적 사운드로 위치를 옮길때 욕망은 탄로난다.
'기존 도덕의 개념'을 지키기 위해서 레스탕그와씨는 하녀 안-마리와 부뒤의 결혼을 주례한다. 이제 부르주아 안으로 들어온 부뒤는 물에 띄워진 꽃들을 만지려 하고, 이 와중 배를 전복시킨다. 후에 그를 찾지 못한 부르주아들은 서로에게 묻는다; '부뒤는 도망친걸까, 죽은걸까?'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애초에 부뒤는 본인이 원해서 물을 떠난 게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물에 들어간 부뒤는 타자에 의해 물에서 빠져나왔고, 다시 본인의 의지대로 세느 강의 물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말로 형용하기 힘든 순간들이 등장한다. 부르주아의 옷을 버리고 허수아비의 옷을 갈아입는 숏, 강에 흐르는 부뒤의 모자의 리듬 같은 순간들은 이 영화를 감싸는 아우라가 된다. 그리고 부뒤의 '물'에 대한 이런 행동은 〈부뒤〉를 정의내리기 힘들게 만들며, 그가 뛰어내린 다리의 이름이 예술의 다리(Pont des Arts)라는 점을 저절로 연상시키게 만든다. 부뒤가 홀로 헤엄쳐 부르주아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목격한 이상 우리에게 그의 자살 시도는 일종의 '예술' 같은 위치에 놓인다. 그가 물에서 나오는 순간, 우리는 그와 안-마리의 결혼식에서 들은 음악을 다시 듣는다. 주관적 사운드가 객관적 사운드의 위치에 범람하는 것을 우린 영화에서 다시 보며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갔다는 듯의 감각을 깨닫는다. '물'에 의해 만들어진 난장판으로 매혹시키는 이 방랑자의 몸짓만큼 르누아르적인게 있을까.
[1] 앙드레 바쟁, 『장 르누아르』
[2] 하스미 시게히코, 『영화의 맨살』
언급한 영화들:
- 익사 직전에 구조된 부뒤 (Boudu sauvé des eaux, 1932)
- 암캐 (La chienne,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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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가렐은 영화가 단순히 성립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몇 안되는 이름이다. 가렐에게 영화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침대 혹은 아이만으로 성립되는 것처럼 보인다. 침대와 아이를 매개로 연애하는 남녀의 갈등을 다루는 그의 작품들은 영화가 간극에 대한 유희에 다름 아님을 간결하게 드러내보이는 대표적인 예다. 여기서의 ‘간극’은 스크린과 스크린 밖을 넘나드는 여러 겹으로 이뤄져 있다.
가렐의 최근 작품인 〈질투〉는 그가 어렸을때 겪은 아버지의 외도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 우린 어린 아이의 시점 숏을 본다. 조그마한 열쇠 구멍으로 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별 순간을 목격하고 있다. 이후 점핑된 시간에서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아버지와 그의 여자친구 간 사랑 이야기를 보여준다. 둘이 사는 조그마한 집의 한 방 속에서 대화하는 남녀의 숏이 반복해 등장하는데 프레임엔 항상 문틀이 보인다. 이때 우린 마치 오프닝에서 아이의 시점 숏처럼 남녀를 몰래 보는 견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가렐은 스크린과 관객 사이의 간극을 내비치고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영화의 사적인 성격을 뻔히 내보임으로서 마치 관객과 은밀한 이야기를 하는 느낌을 주지만, 동시에 그 이야기의 주관성을 인지시킴으로서 은밀함의 불가능을 고백하는 감독이라는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때 영화 속으로 한 겹을 더 벗기는 순간, 너무나도 명백한 남녀의 간극이 드러난다. 필립 가렐의 영화적 정의 중 하나인 ‘침대'를 보자. 침대 위 누워있는 순간들은 거의 드물게 가렐의 영화에서 남녀가 서로를 마주 바라보는 순간들이다. 가렐의 두번째 영화적 정의인 '아이'는 침대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존재인데 정작 침대의 배경과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드물다. 간극이 좁혀질 수 있는 공간에서 만들어진 아이지만, 간극이 좁혀질 수 없는 공간에서 영화의 아이는 등장하고, 이것은 말하자면 결국 두 남녀에게 간극이 좁혀질 수 없음을 예견하는 것만 같다. 이러한 순간은 가렐이 자신의 필모에서 처음으로 내러티브를 도입한 작품이라 알려진 〈비밀의 아이〉에서 드러나는데, 다리를 건너는 와중 장-밥티스트가 엘리의 아이를 돌아볼때 필름 릴이 띄워지는 대목이 그러하다. 이때 그는 영화를 보는 관객의 위치에 놓이게 됨으로서 가렐의 필연적 간극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세르주 다네가 〈비밀의 아이〉를 보고 아이가 결국 '떨리는 셀룰로이드의 조각'이라 한 말과 일맥상통한다.
가렐의 새로운 작품 〈여인의 그림자〉는 이러한 간극의 가장 단순하고 간결한 유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침대 (혹은 거리)로만 이뤄진 영화로, 빠르고 낭비없는 숏들이 등장하고 빠진다.
마농과 피에르는 다큐멘터리를 함께 만드는 부부다. 나치를 죽였다는 고백과 함께 죽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레지스탕스였던 노인의 이야기를 담기로 결심한 피에르를 마농은 옆에서 헌신하며 돕는다. 레지스탕스 영상을 돌려보던 와중 피에르가 홀로 프레임에서 나오고, 다음 숏에 홀로 프레임에 있던 그를 엘리자베스가 입장하며 맞이한다. 둘은 함께 나란히 걷는다. 무척이나 가렐다운 걸음을 거친 그들은 당연하게도 연인이 되고만다. 가렐의 영화에서 거리는 침대와 함께 간극이 좁혀질 수 있는 공간이었고, 걸음은 항상 영화와 거의 별개로 고유의 시간을 지닌 ‘사건’으로 여러 경우 매혹의 장치이자 연인의 것이었다. 〈여인의 그림자〉에서 이러한 걸음의 행위가 지속된 필름 사건으로 새겨지는 순간은 엘리자베스와 피에르가 매혹된 장면을 제외하곤 단 한 번 밖에 등장하지 않으며, 그 한 순간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의 헤어진 피에르와 마농이 재결합하기 직전이다.
가렐은 이 영화를 두고 '남성에 못지 않은 여성의 리비도의 문제로 보는, 평등을 위한 영화'라 했었다. 가렐은 이 평등을 이뤄내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두 이미지를 보여준다. 바람을 핀 후 당당한 남자와 자책하는 여자의 이미지. 〈여인의 그림자〉에서 마농의 서 있는 모습, 피에르의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모습은 계속해 제시되는 뻔뻔한 남자와 안절부절한 여자의 구도이며, 마지막에 마농이 피에르도 바람을 피고 있었던 걸 알았다는 사실을 말하는 순간 전복된다. 피에르와 엘리자베스의 장면들도 많이 다를 바는 없다. 같은 욕망에 대한 상반된 남녀의 태도(와 그의 역사)가 반복되어 단순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여기서의 '반복'은 남자와 여자의 불평등한 역사를 (의도적으로) 되풀이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서 같은 장소의 반복이기도 하다. 같은 장소를 지나는 인물 사이 파토스가 튕기고 역학이 바뀌는 것을 우린 목격한다. 예전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그랬다시피 항상 성적 모티프를 가졌던 계단을 주목해보자. 계단을 지나는 순간들을 유심히 보면, 피에르와 마농의 파토스가 어긋나고 마지막에 충돌하는 이 영화의 역학이 모두 담겨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여인의 그림자〉에서 계단은 다음 순간에 등장한다;
1) 마농이 집에 오며 계단에 떨어진 침대 시트를 목격.
2) 마농이 불륜상대를 집에 데려가는 장면
3) 서로의 바람을 확인한 남녀가 화나 다투는 장면
이러한 ‘반복’으로 되풀이된 남녀와 그 역사의 간극을 아우르는 또 다른 속성 또한 무척이나 가렐적인 시선의 문제인데, 이를 두고 유운성 평론가는 가렐이 '영화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의 얼굴을 하나의 화면에서 동시에 보여주는 일이 왜 그토록 힘든 것일까라는 물음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 바 있다. 이 말을 조금 바꿔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의 시선을 한 화면에서 보여주기 어렵다'고 하고 싶다. 피에르와 마농이 헤어지는 숏에서 피에르는 우는 마농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바로 앞에 있는 그녀의 얼굴을 애써 피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더니 연이은 쇼트에서 마법같은 장면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가렐은 마치 '한 화면 속 시선의 화해'가 불가능하다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혼자 벽을 정리하고, 홀로 걷고 밥을 먹는 피에르의 모습이 연속으로 나오더니 갑자기 그가 프레임 왼쪽에서 오른쪽을 바라보는 어떤 무(無)의 순간이 나온다. 더 놀라운건 이어지는 숏이다. 다음 쇼트에서 마농은 프레임 오른쪽에서 왼쪽을 향한 시선을 포기한다. 이렇게 다른 시공간에 있는 마농이 마치 피에르의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쇼트가 연결되었다.
이와 같은 순간은 거의 같은 방식으로 반복된다. 마농의 어머니를 만난 피에르가 홀로 걷다 잠시 멈추고 오른쪽을 바라본다. 바로 붙어진 숏에서 피에르와 정반대의 동선으로 (오른쪽→왼쪽) 프레임에 입장해 왼쪽을 향한 시선을 계속해 유지한다. 둘은 떨어진 공간에서 프레임 내 시선의 화해를 겪는 셈으로, 다른 쇼트에서 나마 이어지는 둘의 시선은 재결합을 예고하는 것이자 앞에서 가렐이 말한 일종의 평등이 이뤄지는 순간이다 (이 순간, 마농의 숏 공간 밖에서 남녀가 성관계를 갖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이 단계를 거친 피에르와 마농은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었던 남자의 장례식에서 만난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피에르에게 마농은 레지스탕스라 주장한 노인의 정체가 거짓이었다고 알려준다. 비웃음의 대상이었던 가짜-레지스탕스 노인의 역사와 남성-욕망의 역사가 포개지며 남자는 장례식에서 죽음을 응시한다. 이와 같이 죽음을 응시하는 남녀를 보며 상반된 사례인 〈이탈리아 여행〉과 〈흐트러진 구름〉이 떠오른다. 나루세와 로셀리니는 다른 단위와 방식의 사유를 통해 같은 이미지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모두 여행(타지의 과거와 자신의 과거)로 이뤄진 두 영화는 그 여행의 성격에서도 명백히 다른 사유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명의 근심을 진 사유를 하는 로셀리니와 달리 나루세는 지극히 개인의 관점에서 사유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두 영화에서 남녀는 죽음의 이미지를 목격한 뒤 다른 반응을 보인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손을 잡은 두 남녀가 죽음의 순간에 보존된 모습을 봤을때, 문명의 짐을 지닌 두 남녀는 세상과 화해해야만 했고, 재결합 해야'만' 했다. 반면, 〈흐트러진 구름〉에서 여자가 여관 앞에서 자살한 남녀를 보는 순간 영화는 남자와 여자 사이 희미한 선을 그린다. 그러나 둘이 함께 죽음의 이미지를 맞이한 순간, 그 희미한 선은 끊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살기 위해 이어지지 말아야 할 선은 끊어져야 한다.
〈여인의 그림자〉는 어떤가. 죽음을 응시한 남녀는 좁혀진 간극의 걸음을 지닌다. 남녀의 걸음걸이가 지속된 사건으로 담긴 두 장면 중 유일하게 서로를 보며 걷는 이 장면에서 매혹의 걸음걸이와 화해된 시선이 한 프레임에서 가능해지는 순간, 남자는 처음으로 미소를 띠고 여자의 그늘 아래 있음을 인정한다. '개인’의 단위에서 오래된 남녀 욕망의 불평등한 ‘역사’를 사유하는 이 영화를 통해 가렐은 공존할 수 없는 것으로만 보였던 문명과 개인의 사유라는 테제의 화해를 이뤄냈다.
가렐은 (거의) 항상 비극적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여 남녀 간 어긋나는 사랑, 마주치지 않는 시선에서 절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런 형용할 수 없는 얼굴들, 빛과 어둠의 여백이 잡아내는 절망의 공기, 그 속에서 그는 희망을 찾는다. 비극에서 찾는 희망, 사적인 영화로 인물에게 진정한 연민을 이끌어내는 것의 가렐의 영화라 생각한다. 흑백 필름으로 찍는 그의 영화처럼 흑으로 덮인 세상에서 백을 찾은 것 같다. 가렐의 영화에서 〈새벽의 경계〉까지 주인공은 자살한다. 그의 다음 작품 〈뜨거운 여름〉에서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살며 우연한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다. 죽으려는데 사는 인물의 놀라움은 삶의 지속을 통해 〈질투〉에서 더 큰 변화를 알린다. 〈여인의 그림자〉에서 가렐은 아예 '자살'을 영화 밖으로 밀어내버린다. 이런 그의 결단을 보며 난 이 변화를 끊임없이 긍정할 것이라 다짐했다. 서로 시선과 걸음이 멀어지며 짙한 죽음의 기호에 다가가던 〈여인의 그림자〉의 남녀는 그 기호가 극에 달한 장례식을 빠져나와 좁혀진 걸음으로 죽음을 밀어낸다. 남녀가 죽음/역사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사를 쓰길 바라는 가렐의 이 제스처는 그의 말마따나 ‘영화는 삶을 사는 충동을 주는 것’으로 작년 극장에서 목격한 가장 아름다운 기적이었다.
글에서 언급한 영화들
- 질투 (La jalousie, 2013)
- 비밀의 아이 (L’enfant secret, 1979)
- 여인의 그림자 (L’ombre des femmes, 2015)
- 이탈리아 여행 (Viaggio in Italia, 1953)
- 흐트러진 구름 (乱れ雲, 1967)
- 새벽의 경계 (La frontière de l'aube, 2008)
- 뜨거운 여름 (Un été brûlant,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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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미 시게히코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스필버그는 여전히 너무 알려졌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다. 상당수의 해외 비평가들은 스필버그를 작가로서 바라보지 않는 경향이 있고, 정작 그보다 못한 여러 감독에겐 온갖 신경을 써가며 비평적 할애를 다투곤 한다. 물론 이를 감안한다고 해도 이번 작품에 대한 무관심은 너무 심하다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린치의 영화에서 왜 여자가 항상 우는지 궁금해하고, 이스트우드의 남자가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를 궁금해 하지만, 스필버그의 남자가 항상 집에 돌아오는 것은 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까. 이 비평가들은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가 디지털 시네마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 '영화적 사건'이라 생각하지만 존 포드가 〈젊은 날의 링컨〉과 〈역마차〉를 한 해에 만든 것이 말이 안되는 것처럼 스필버그가 〈틴틴〉과 〈군마〉를 같은 해에 만들었다는 사실이 '영화적 사건'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BFG〉를 둘러싼 오해를 보며 트뤼포가 히치콕에 대해 미국에서 얘기한 일화가 떠올랐다. 히치콕의 〈이창〉에 대해 미국 기자가 트뤼포에게 말하길, '당신은 왜 히치콕과 이 영화를 높이 평가합니까? 혹시 당신이 뉴욕을 몰라서 그런 것 아닐런지요'. 그러자 트뤼포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이것은 영화에 대한 영화입니다. 난 뉴욕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영화에 대해선 알 만큼 압니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BFG〉가 '영화에 대한 영화'임을 쉽게 알아차리고 공감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스필버그는 어느때보다 영화와 영화를 이루는 새로운 물성을 힘차게 긍정한다.
〈BFG〉는 꿈을 잡고 만들며 나눠주는 거인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거인'이라는 단어를 제외하면 '영화 감독'의 정의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소피가 거인의 '꿈 나눠주기'에 처음으로 동행하는 장면에서 우린 이 영화가 영화에 대한 우화임을 처음 깨닫게 된다. 신비로운 안개가 아이와 어른 사이 방을 가르고 일종의 스크린이 되어 '꿈(영화)'을 영사하고, 이때 창문으로 이를 바라보는 거인과 소피의 얼굴은 관객의 자리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꿈을 제조하는 장면은 이에 더한다. 소피의 도움으로 거인이 꿈의 요소들을 동그란 기계에 넣은 후, 이를 다른 휠로 돌리니 천장에 안개가 생기고 꿈이 보이는 모습은 영사기에 필름 릴을 돌려 스크린에 상영하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노골적으로 영화에 대한 우화임을 선언하는 데서 스필버그의 전략이 끝난다면 참으로 빈곤한 것일 테다 (그렇기 때문에 〈BFG〉를 논하며 영화에 대한 영화로서의 메타성만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는 이런 선언 속 '좋은' 꿈의 역할에 대한 긍정을 제스처의 수사로 선보인다. 그 수사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 먼저 '긍정'이라는 표현과 함께 〈BFG〉를 논할 때 많이 쓰이는 '순수'라는 수식어를 언급하고 싶다. 〈BFG〉를 단순한 '순수' 환영의 우화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건 스필버그가 수많은 소설 중 로알드 달의 이야기를 가져왔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예견된 바다. 〈BFG〉는 되려 내재한 불투명함을 투명하게 만드는 영화로, 순수하지 못한 꿈의 세상에서 순수한 꿈만을 보이고픈 몸짓의 영화다. 해피엔딩의 동화같아 보이는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정작 영화 속엔 어린 아이들의 납치와 식인거인이 등장한다. 이렇게 불투명한 배경 속 빛을 밝혀주는 것은 다름 아닌 꼬마 거인의 몸짓이다.
꼬마 거인이 소피의 안경을 챙기는 행위는 〈BFG〉를 관통하는 제스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피는 눈이 그닥 좋지 않아 안경을 자주 쓰는게 정상인 아이인데,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안경을 자주 쓰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소피가 안경을 착용한 다음 순간들은 눈여겨 봐야한다.
1) 새벽에 몰래 책을 읽고 꼬마 거인을 발견해 납치당하는 장면
2) 꿈나라(Dream Country)에서 꿈의 소리를 들으려 할 때
3) 꼬마 거인과 함께 아이에게 꿈을 불어넣어줄 때
4) 꼬마 거인이 자신을 잡아줄 거라 믿으며 떨어질 때
이 장면을 제외한 수많은 상황에서 소피는 안경을 쓰지 않는다. 특히나 식인 거인들이 등장하는 악몽과도 같은 장면에 그녀는 항상 안경을 착용하지 않고 있으며, 거인들이 예상치 못한 순간 씬에 입장할 때 자신의 안경을 떨어뜨리거나 놓친다. 결국 좋은 꿈과 연관되는 장면엔 항상 안경을 쓰고, 그렇지 않은 장면에선 안경을 벗고 있는 셈이다. 이때 나쁜 꿈과 같은 씬에서 놓치고 떨어뜨린 안경을 조심스레 챙겨주고, 2번과 같이 좋은 꿈에 해당하는 경우에 안경을 건네주는 사려깊은 꼬마 거인의 제스처야 말로 먹구름을 걷혀주는 몸짓으로, 〈BFG〉의 가장 아름다운 요소다.
스필버그에게 영화는 항상 집으로 귀환하는 사람의 것으로 거울에 의해 보여졌다. 이는 그의 최근 영화들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군마〉는 떠나고 돌아오는 말의 운동 자체가 영화의 원동력이 되는 거울의 영화고, 〈링컨〉은 존 포드의 〈젊은 날의 링컨〉이 다룬 시기와 안에서 벌어지는 숏들을 보이지 않는 거울에서 바라본 영화였으며, 〈첩자들의 다리〉는 집으로 귀환하는 스파이와 변호사가 거울을 봄으로서 귀환을 예감하고, 거울이 비춰짐으로서 집에 도착함을 실감하게 만든 영화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BFG〉를 보면 저절로 의문이 드는 대목이 생긴다. 거울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소피가 처음으로 궁전에 도착한 장면이라는 점. 영화의 마지막에 소피가 앞서 잃어버린 담요를 쓴 채로 궁전에서 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모습이 나오게 되고 우린 묻게 된다. 소피의 집은 어디인가? 고아원에서 시작한 영화는 모두 꿈이었는가?
그 질문에 〈BFG〉의 아름다움이 숨겨져있다. 〈BFG〉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물성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어디가 꿈이고 어디가 현실인지 육안으로 구분하기 힘든 인공적인 물성이 영화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 유일한 차이를 느끼게 만드는 것은 소피라는 아날로그 육체와 거인이라는 디지털 육체다. 그리고 이 둘을 함께 담은 주된 풍경인 거인나라(Giant Country)의 물성은 신비로운 것으로 남는다. 마치 포드의 영화에서 귀환하기 위해 거치는, 영화 자체가 사로잡힌 풍경인 모뉴먼트 밸리처럼 자이언트 컨트리의 거대한 바위와 푸른 풍경은 여기서도 귀환을 위해 꼭 거쳐야하는 풍경으로 서부극의 중심에 자리잡은 그 지평선의 '형상'과 같은 역할을 하고, 스필버그는 (말하자면 이미지 그 자체보다 이미지의 개념으로서) 이 '형상'을 디지털에 새겨 얻어냈다.
집과 귀환의 질문은 이뿐만 아니라 창 안으로 꿈을 들여다보는 행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BFG〉에서 여러번에 걸쳐 나오는 이 행위는 마치 '영화 보기'와도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에 놓인, 눈 앞의 같은 이미지를 거울처럼 대칭적으로 마주보게 된 〈첩자들의 다리〉의 도노번을 저절로 떠올리게 만든다. 근작에 가까워질수록 스필버그는 관객과 스크린의 필연적 간극이 불러일으키는 질문을 잊지 않는다. 항상 긍정된 스필버그적 인물의 귀환은 언젠가부터 아이러니의 향기를 듬뿍 풍기고, 관객의 자리를 되묻게한다. 헌데, 〈첩자들의 다리〉는 모든 갈등이 끝난 것으로만 보이는 마지막에 같은 숏을 반복함으로서 우리에게 결국 거리에 대한 영화였음을 다시 인지시킨다. 그렇다면 〈BFG〉는 어떠한가? 꿈과 같은 거인나라와 반대인 현실의 경계엔 항상 창문이 있었다. 창문 밖에서 창문 안으로 꿈을 넣고, 창문 밖에서 안의 꿈을 보곤 했다. 이런 경계의 유희가 중첩되는 순간에(소피가 여왕에게 꼬마 거인을 소개하는 순간) 소피가 창문 틀에 서 있음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BFG〉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피는 침대에서 일어 안경을 쓰지 않은 채 창문 밖을 쳐다본다. 안경을 착용하지 않은 채 창문 밖을 보고 BFG를 부르는 그녀의 외침이 직접적으로 그녀의 말을 듣는 꼬마 거인의 숏과 연결될 때, 우린 비로소 '본다'는 행위가 전이되어 현실로 옮겨질 수 있다는 스필버그의 믿음을 엿보게 된다. 밤 런던의 아날로그적 배경으로 시작해 빛나는 아침의 디지털 얼굴로 끝나는 이 영화에서 스필버그는 디지털이야말로 관객이 얽매였던 자리에서 해방될 수 있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언급한 영화들:
- 내 친구 꼬마 거인 (The BFG, 2016)
- 아바타 (Avatar, 2009)
- 젊은 날의 링컨 (Young Mr. Lincoln, 1939)
- 역마차 (Stagecoach, 1939)
- 틴틴의 모험 (The Adventures of Tintin, 2011)
- 군마 (War Horse, 2011)
- 이창 (Rear Window, 1954)
- 링컨 (Lincoln, 2012)
- 첩자들의 다리 (Bridge of Spie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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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엔틴 타란티노는 자신이 사랑한 영화, 배우와 장르를 재조립해 영화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시네아스트 중 한 명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전히 사람들의 입엔 타란티노의 작품이 지닌 재미와 감정적 카타르시스에 대한 논의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 글에선 타란티노의 가장 훌륭한 영화 중 한 편인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을 통해 그가 영화다움을 추구하는 동시에 영화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내포한 작품을 만드는지 말해보려 한다.
〈바스터즈〉에서 타란티노는 시작부터 끝까지 수많은 영화로부터 마음껏 차용하며, 감탄을 부르는 대사들로 긴장을 유지시켜 언제나 그렇듯이 관객에게 영화적 경험을 제시한다. 여기에 멈추지 않는고 더 멀리 나간다는 것이 이 작품의 중요한 지점이자, 그의 영화 중 어떤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바스터즈〉는 영화에 대한 사랑과 근심이 동시에 드러나는 작품으로, '영화 자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표면적 믿음 속 그 선언의 불가능성을 인지하는 영화다. 여기엔 아름답고 화려한 영화의 역사 뿐만 아니라, 그의 악용 사례 또한 넘친다.
1장: 옛날 옛적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에서
오프닝 타이틀의 음악은 〈알라모〉의 주제곡으로, 멕시코 영토였던 텍사스의 독립선언을 잠재우기 위해 파견된 토벌군을 상대로 알라모에서 맞서다 죽은 이들의 이야기다. 시작의 음악부터 타란티노는 우리에게 이 영화가 존 웨인이라는 배우로 대표되는 서부극과 역사와 영화 속 역사의 괴리에 대한 것이라고 귀띔해주고 있는 셈이다. 'Once Upon A Time'이라는 눈에 익은 오프닝 타이틀과 서부극을 보는 듯한 마을의 풍경이 등장하며 노골적인 귀띔은 계속된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한스 란다와 피에르의 대화 장면은 환한 밖과 달리 로우키 조명으로 촬영하여 입장할 때부터 불길한 느낌이 저절로 유발한다.
이 장면에서 타란티노는 외화면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한스 란다의 위압감을 제시한다. 두 남자가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기 전, 한스 란다에게 피에르의 딸이 우유를 따라주는 순간 밖에서 젖소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대목의 그 시작이며, 이어지는 대화의 숏을 처리하는 규칙에서도 드러나는 바다. 대화의 초반엔 오버 더 숄더 숏의 숏-리버스 숏으로 대응되어 보이는 두 남자의 모습은, 피에르가 '유대인 사냥꾼' 한스 란다의 명성을 인정하자 변하게 된다. 이부터 란다가 말하는 숏은 같은 오버 더 숄더 숏의 방식을 유지해 피에르의 뒷모습을 보여주지만, 피에르가 대사를 읊자 란다를 외화면으로 처리해버린다. 반복해 튕기는 숏에서 땀으로 가득찬 피에르의 뒷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드는데 충분하다.
드넓은 풍경에서 폐쇄된 집 안으로 이동하는 공간의 압박, 대사로 좁혀가는 한스 란다의 어휘력과 긴장 순간에 피에르의 얼굴을 클로즈업을 해 다가가 카메라 속에 갇힌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카메라의 압박, 그리고 언어의 압박 (한스 란다는 피에르의 집에 들어가자 마자 딸들의 외모를 칭찬하고 우유를 요구했다. 피에르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언급하며 무의식적으로 그를 압박한 셈이다) 3중주의 요소가 차츰 차츰 쌓이며 사람을 몰아가고 조인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서스펜스를 선사한다.
이런 서스펜스가 가장 고조되는 순간은 매우 중요하다. 한스 란다가 피에르에게 유태인들이 어디있는지 캐낸 후, 프랑스어로 말하며 몰살을 준비하는 숏에서 타란티노는 나치군의 발만 찍는다. 바닥 밑에 숨어있는 유태인들의 시점으로 보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유태인들은 제대로 보이지 못하는 존재들에 의해 몰살을 당한다. 3년 후, 쇼산나가 한스 란다를 다시 만나게 되어 몰살의 날을 회상할 때 흐르는 음악은 〈심령의 공포〉의 노래다. 타란티노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강간당하는 이야기(〈심령의 공포〉)와 보이지 않는 나치군에게 죽임을 당한 유태인들의 이야기(〈바스터즈〉)를 연결하고 있다.
2장: Inglourious Basterds & 3장: 파리에서의 독일 저녁
바스터즈가 등장하는 2장의 제목은 영화 자체의 제목으로, 의미심장한 부대의 등장을 예고한다. 타란티노는 영화의 1부에서 오프닝-음악과 제목으로 서부극을 불러내었는데, 쇼산나가 도망치는 장면에서 본인의 선언을 가장 뚜렷히 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예전부터 타란티노는 공개적으로 존 포드-존 웨인이 대표하는 서부극에 대한 분노와 경멸을 언급해왔다 (여기서 다루진 않겠지만,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이 이런 감정은 존 포드의 영화에 대한 오해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쇼산나가 도망치는 장면은 엄연히 〈수색자〉의 두 숏을 불러내는 것이다. 〈수색자〉의 클라이맥스 즈음에 나탈리 우드가 존 웨인으로부터 도망치며 동굴에 다가가는 숏과 존 웨인이 집 문을 나서며 그리우는 그림자가 아른한 마지막 숏. 타란티노는 두 숏과 반전된 도식의 숏을 가져와 도망치는 인디언-백인 여자의 자리에 유대인 쇼산나를 놓고 존 웨인의 자리에 악명 높은 나치를 위치시킨다.
이어서 도망친 쇼산나가 다시 등장하고, 나치군 프레더릭 졸러가 작업을 걸 듯이 말을 거는 장면은 〈바스터즈〉가 영화 내내 영화임을 인지시키고, 인물들이 일종의 역할을 연기하는 듯한 톤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여기서 나치군인 졸러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쇼산나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기 때문에 계속 말을 걸지만 그녀에게 그는 나치군일 뿐이다. 타란티노는 오프닝에서 외화면을 활용한 것처럼 둘의 대화 장면을 비슷한 방식으로 찍어 각자의 입장을 쉽게 제시한다. 졸러가 말을 할때 쇼산나는 프레임 밖에 있지만, 쇼산나에 관심있고 귀 기울이는 졸러는 그녀가 말하는 쇼트에서 프레임 안에 있다. 둘의 대화가 끝나고 떠나가는 졸러의 모습은 마치 무대에서 퇴장하는 연기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 장면에서 보이듯이 〈바스터즈〉가 하나의 연극같이 느껴지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바스터즈〉는 〈수색자〉를 향한 단순한 오마주보다, 미국-프랑스의 두 배우의 이름을 빌려 2차 대전을 새로운 배경 삼아 은밀하게 재연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바스터즈의 대장 알도 레인(Aldo Raine)은 명백히 배우 알도 레이(Aldo Ray)의 이름을 따온 것이며, 쇼산나의 가명(Emmanuelle Mimieux)은 영화에서 감탄사처럼 속삭여지는 다니엘 다류(Danielle Darrieux)의 변주다. 존 웨인과 함께 문에 위치한 란다와 달리, 알도 레인은 직접적으로 존 웨인의 역할을 맡은 캐릭터로, 인디언 피가 섞인 사람이며 숨어있다 공격하는 방식 또한 서부극에서 아파치의 그것과 동일하고, 〈수색자〉에서 세뇌당한 나탈리 우드와 달리 쇼산나는 본인의 복수를 위해 가명을 쓰고 '연기'를 한다. 〈수색자〉의 클라이맥스와 달리 〈바스터즈〉에서 이 둘은 만나지 못한다.
4장: 키노 작전
타란티노와 직접 대화한 적이 없으니 알 수 없지만, 나는 분명히 마지막 두 챕터 때문에 타란티노가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믿는다. 앞의 두 서사가 교차하게 되는 그 지점, 바로 시네마 작전이다. 작전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영화평론가다. 그는 바스터즈의 일원들과 프랑스의 지하 술집에 잡입하여 모두와 같이 (영화 내내 그랬던 것처럼) '연기'를 한다. 캐릭터들은 다른 국적의 인물을 연기하고, 다른 언어를 구사하며, 다른 복장을 입는다.
이러한 연기를 가장한 놀이인 카드 게임은 길게 유지되는 술집 장면에서 꾸준히 극 앞에 놓인다. 이것은 여러 의미에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인물들이 얼굴에 붙여있는 무언가를 맞추려한다는 것이 놀이의 주 목적, 다시 말해 인물들이 일종의 가면을 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가면의 추리의 대상이 무엇인가 하면 극의 배경의 영화 산업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바스터즈〉는 꾸준히 소환/불러내는 서부극 영화들과 달리 '미국'이라는 정체성은 기피한다. 유태인과 나치라는 구도는 명백하지만, 프랑스, 영국, 미국 등 국적을 앞세우지 않고 있다. 그 이유를 이 놀이로 타란티노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타란티노는 냉소를 띈 미소를 지으며 역사를 (나쁜 의미로) 바꾼 영화사의 범인은 독일 뿐만 아니라 미국 또한 해당한다.
마치 윙크하듯이 적힌 부분이 두 번째 카드 게임이다. 킹콩'이라는 답을 맞추기 위해 독일 장교는 근원, 행적 등에 대한 질문을 한다. 그가 답에 가까워짐에 따라 은연 중에 답이 둘 중 하나로 좁히게 된다. 흑인과 킹콩. 정글에서 사슬에 묶인 채 미국에 온 존재라는 힌트에 야수 '킹콩'과 사람인 '흑인'이 같은 취급을 받아온 이른 역사에 대한 타란티노의 비판이라 볼 수 있다.
5장: 거대한 얼굴의 역습
드디어 도달한 클라이맥스의 장소는 바로 극장이다. 주요 나치 인사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고 서로의 존재를 모른채 두 작전이 진행되어 만나는 공간이다. 이 장면에서 우린 타란티노가 성숙해지고 진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데쓰 프루프〉까지만 해도 그는 도덕, 윤리를 신경쓰지 않고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데 온 힘을 써왔다. 그렇기에 그의 전작들은 딱히 윤리를 논할 위치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바스터즈〉는 윤리적인 영화다. 그는 영화가 비윤리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인지시켜 영화가 현실로 전이되는 현상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탑에서 적군을 쏴 죽이는 졸러의 모습을 보고 기쁨과 감동에 찬 나치의 모습은 미국 유태인 두 명의 총에 쏘여 죽어가는 나치의 모습을 보고 통쾌해하는 우리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특히나 이때 영화 속 영화의 졸러가 탑에서 총을 쏜 것처럼 〈바스터즈〉의 유대인 두 명은 2층의 오페라석에서 아래로 총을 쏘고 있다). 이미 죽을 운명임을 알고 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는 더 심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이 사태 바로 전엔 쇼산나가 졸러와 함께 죽는다. 이것 또한 그와 말한 바가 아니므로 알 수 없지만, 타란티노가 영화 각본을 처음 집필할 때부터 쇼산나는 죽을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의 이유가 떠오르는데, 다음 장면에서 자신이 만든 영화로 스크린에 등장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유령 같다는 점과 이 영화에서 타란티노가 영화사 속 '영화'를 훼손한 인물들을 모두 죽였다는 점이다. 평소에 타란티노는 영화 자체와 그것의 가장 숭고한 형태인 필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믿음을 각종 인터뷰로 고백해왔다. 쇼산나는 수백개의 필름을 불로 태울 계획을 세웠고, 그 댓가를 치룬 셈이다.
쇼산나의 커다란 얼굴이 등장함과 함께 불에 붙은 필름은 결국 영화 스크린의 이미지가 곧 현실이 되는, 너무나도 순수한 영화적인 환영이다. 영화 속 현실이 영화의 영화로 (쇼산나의 죽음 이후 등장한 그녀의 스크린 위 형상) 번지고 영화의 영화가 영화 속 현실로 (프레더릭 졸러의 활약에 이어 나오는 바스터즈의 총질), 궁극적으로 영화 속 현실이 영화 밖 현실로 (〈국가의 자랑〉을 보고 웃던 나치의 모습이 나치를 죽이는 바스터즈의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우리의 모습으로) 감염되는 스크린의 '순수한' 환영에 대해 타란티노는 근심한 표정을 내비치고 있다. 영화 속 영화에서 스크린이 불태워 없어짐으로서 영화 속 관객은 현실에 놓이게 되고, 이는 결국 영화관 안에 있는 자가 모두 살아남지 못한 것과 연결된다. 결국 영화의 총소리에 집중하느라 영화관 밖 총소리를 듣지 못한 관객은 총에 죽는다 (타란티노는 이 효과를 위해 여러 장면에서 상영관 밖 총소리가 난후 인물이 초조하게 상영관 속을 들여다 보는 장면을 넣는다).
그러나 이 영화가 단순히 영화에 대한 의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영화의 4장엔 한스 란다가 발견한 한 짝의 구두를 여자 배우에게 맞춰보려하는 장면이 나온다. 5장에서 그가 미국과 협상하는 장면을 보며 그 구두가 떠올랐다. 이것은 한스 란다의 '신데렐라'인가? 어쩌면 맞을 수도 있다. 여기서 타란티노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가 아는 역사만이 진실인가? 영화가 진실일 수도 있다고 그는 믿는다. 결국 우리가 본 이야기에서 역사에 남는 것은 한스 란다일 것이고, 어디에도 쇼산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연기' 때문에 위기에 놓이고 죽음을 마주친 여러 명의 '배우'들과 달리, 언어의 능구렁이인 한스 란다는 마치 이 모든 이야기를 집필한 감독과도 같다.
〈바스터즈〉는 영화에 대한 사랑만을 고백하고 통쾌함을 선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다. 되려 전혀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삼은 〈수색자〉의 시대착오적 재연으로, 영화사와 영화 자체에 대한 믿음과 불신의 씨름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언급한 영화들
-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Inglourious Basterds, 2009)
- 알라모 (The Alamo, 1960)
- 심령의 공포 (The Entity, 1982)
- 수색자 (The Searchers, 1956)
- 데쓰 프루프 (Death Proof,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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